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67

병상 일기/ 이해인

병상 일기/ 이해인 아플 땐 누구라도 외로운 섬이 되지 하루 종일 누워 지내면 문득 그리워지는 일상의 바쁜 걸음 무작정 부럽기만 한 이웃의 웃음소리 가벼운 위로의 말은 가벼운 수초처럼 뜰 뿐 마음 깊이 뿌리내리진 못해도 그래도 듣고 싶어지네. 남들 보기엔 별것 아닌 아픔이어도 삶보다는 죽음을 더 가까이 느껴보며 혼자 누워 있는 외딴 섬 무너지진 말아야지 아픔이 주는 쓸쓸함을 홀로 견디며 노래할 수 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삶을 껴안는 너그러움과 겸허한 사랑을 배우리. 오늘이 ‘세계 병자의 날’이다. 그런 날도 있나 싶겠지만 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와 이들을 돌보는 의료 종사자들에게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고자 1992년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께서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기념일인 2월 11일을 병..

달북/ 문인수

달북/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 시집 ‘쉬!/ 문학동네’ 중에서 - 1969년 여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실황을 위성으로 생중계할 때 지직대는 흑백텔레비전 수상기 앞에서 우린 모두 숨을 죽였다. 이태백이 놀던 계수나무와 떡방아를 찧는 토끼가 화면에 잡히지 않을까 숨죽였으나 신비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과학자들이 말해왔던 공기도 물도 없는 불모의 먼..

참스승 / 목필균

참스승 / 목필균 꽃 이름만 배우지 마라 꽃 그림자만 뒤쫓지 마라 꽃이 부르는 나비의 긴 입술 꽃의 갈래를 열어 천지(天地)를 분별하라 몸으로 보여주는 이 - 시집 ‘꽃의 결별’ 중에서 - 20년 전 모 항공사에서 일할 때 얘기다. 뉴욕 JFK공항으로 출장차 탑승한 비행기가 착륙을 앞두고 20여분간의 선회비행 끝에 공항에 내렸다. 그 곳 기상상태는 쾌청이었고 기체의 결함 또한 없었다. 그런데 왜 기장은 긴박한 공항 사정으로 인하여 착륙이 지연된다고 기내 방송을 했으며, 실제로 20분 이상 공중을 뱅글뱅글 돌았을까? 공항의 활주로 사정이 좋지않다는 정보는 기내에서 접수하였으나 그 자세한 내막은 운항관리실에 도착한 뒤에야 제대로 풀렸다. 원인은 허드슨 강에 주로 서식하는 수천 마리의 새떼(펠리칸 종류)들이 ..

다우너 / 이성목

다우너 / 이성목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뒷다리의 힘을 풀고 주저앉는다. 인부는 전기 창으로 소를 찔러 일으켜 세우지만 이내 다시 주저앉는다. 오물 진창에 드러누워 다리를 버둥거리는 소를 지게차로 들어 일으켜 세우지만 또 주저앉는다.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 인부는 필사적으로 소를, 살아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게 한다. 얼마 전 새로 산 구두는 천연소가죽인데도 뒤축이 너무 자주 무너진다. 주저앉은 굽을 뽑고 새 징을 박아 구두를 일으켜 세운다.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 나는 먹고 또 살아야하므로, 필사적으로 구두를 걷게 한다. 청계광장에, 촛불을 하나씩 받들고 주저앉은, 어린 소는 이제 막 이마에 뿔이 나기 시작했다. 소가 뿔로 땅을 밀고 스스로 끙 일어서기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위험한 식사/ 최문자

위험한 식사/ 최문자 무서운 일이다 50년 이상 매일 매끼니 저 불량한 밥을 위하여 세상에다, 끝도 모서리도 없는 둥근 밥상 하나 차리는 노동. 거품 물듯 흰 밥알 한 입 물을 때마다 이빨과 이빨 사이에서 와와, 흩어지던 으깨진 희망. 산다는 건 세상이 나를 질겅질겅 밟고 지나가는 아, 말발굽 같은 식사. 산다는 건 아주 벙어리인 나로 깔릴 때까지 밥상 하나 차리며, 밥상이 나를 차리며 서로 반질반질하게 길들이는 노동. 무서운 일이다. 50년 넘게 이렇게 매일 매끼니 밥을 이기며 아슬아슬하게 밥을 먹어치우는 위험한 식사 저 불량한 칼 같은 밥을 먹기 위하여 꼭두새벽 나는 숟가락을 들고 나선다. - 시집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랜덤하우스,2006) 한 때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라는 좀 ..

막노동을 하고 싶다는 후배에게 / 유용주

막노동을 하고 싶다는 후배에게 / 유용주 일을 한다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품을 판다는 것인데 우스운 것은 품보다 포옴을 파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야 정당하게 품을 팔아야 바른 삶을 일구어나갈 것인데 폼부터 먼저 팔려고 드니 한심한 일 아닌가 먼저 정직하게 품을 팔 것 품파는 데 자신없는 사람이 포옴을 먼저 팔려고 든다는 것을 명심하세 땀냄새가 얼마나 구수한 줄 아나 그 냄새를 진짜 맡을 때까지 치열하게 자신을 밀어붙일 것! 건투를 비네 - 유용주 시집 '가장 가벼운 짐'(창작과비평사)중에서- 폼을 잡는 일이 품을 파는 일이고, 품을 파는 일이 폼을 잡는 일이라면 얼마나 소망스럽겠나. 솔직히 막노동에 무슨 폼이 나겠냐만 그것도 요즘엔 아무나 마구 할 수 있는 노릇은 아닌 것 같다. 그저께 텔레비전에서 보..

싸락눈/ 정양

싸락눈/ 정양 검불 덥힌 마늘밭 언 마늘씨를 캐먹으며 아이들은 속이 쓰리다 싸락눈 몰아오는 흐린 하늘밑 손가락으로 혓바닥으로 싸락눈을 받아먹으며 아이들은 또 어디를 갔는지 어디로들 가서 쓰리고 긴 겨울을 캐고 있는지 흐린 하늘을 휩쓸며 희끗희끗 또 싸락눈이 내린다 - 정양 시선집 ‘눈 내리는 마을’ 중에서 - 배고픈 아이들의 겨울이 마치 먹을 것 없는 고라니의 배회처럼 쓰리다. 견딤의 비감이 명징하게 채색되고, 어두운 메시지가 들어앉아 있음에도 한줄기 애틋한 그리움이 선명하여 얼핏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 비감의 유연함이 현실의 어두움을 환상 속의 밝음으로 이끌어 가는 듯 읽혀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를 처음 접한 건 10년 전 중국의 동북지방을 여행하면서 우연히 그곳 헌책방에서 발견한 북..

나는 달빛 신민이었다 / 김복연

나는 달빛 신민이었다 / 김복연 대구광역시 불로동에는 고분군이 있고 그 안에는 달빛 왕국이 있다 삼국시대 즈음 확실하지 않는 어느 고대부터 지금까지 달을 숭배하는 그 곳은 달 모양으로 빚은 수백 채의 봉분들 또 집집마다 태기가 있거나 만삭이어서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내가 숨이 먼저 차는 그 곳은 기이하게도 생리혈 비치는 날인데 이런 몸끌림의 난감함도 잠시 이미 나는 달빛 신민이었던 것처럼 복식호흡은 물론이고 내 몸 구석구석 내가 모르는 어느 전생의 슬픔까지 적시는 무장무장한 달빛, 결국 나는 만월로 둥둥 떠 하염없이 고요하거나 깊어지는 것이다 이런 다음날은 어김없이 고분 한 채가 사라지거나 늘어나는 것을 달빛을 밴 나만 알고 있다 - 시집 가운데 - 텔레비전의 한 퀴즈프로 문제에 거액의 상금이 걸렸다...

토란국/ 김정호

토란국/ 김정호 노을이 금용사 뒤 능선에서 한껏 심지를 태우고 있다 스님의 이른 저녁 들레 밥상에서 토란국을 먹는다 그런데 아무리 저어봐도 토란이 없다 넒은 잎 비가려 쓰던 그 대궁으로 울 엄마 맛내던 토란국도 아닌 외할머니 얼얼하게 빚어낸 알토란도 아닌 그냥 토란 전분으로 무덤덤하게 끊여낸 내용 없는 토란국을 이 저녁 스님은 내게 법문 던지듯 내어놓으셨다. 저녁예불 목탁소리 어스름에 잠기고 그 여운 수국 맴돌다 함께 떠나는 바람처럼 - 계간 문학예술 2008년 가을호 - 특별히 장만한 명절의 특식이라야 추석의 송편이나 설날에 먹는 강정과 떡국 정도겠는데, 그것 말고는 달리 먹어본 기억이 까마득해서 토란을 설날에 먹었는지 추석날에 먹었는지 아리송하다. 숟가락으로 썩 칼질을 하면 부드러운 속살이 저항 없이..

어둠의 단애 / 류 인 서

어둠의 단애 / 류 인 서 저문다는 것, 날 저문다는 것은 마땅히 만상이 서서히 자신의 색을 지우며 서로의 속으로 스미는 일이라야 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서로의 그림자에 물들어 가는 일이라야 했다 그렇게 한 결로 풀어졌을 때, 흑암의 거대한 아궁이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일이라야 했다 너를 바래다주고 오는 먼 밤, 제 몫의 어둠을 족쇄처럼 차고앉은 하늘과 땅을 보았다 개울은 개울의 어둠을 아카시아는 아카시아의 어둠을 틀어안고 바윗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누구도 제 어둠의 단애 밖으로는 한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한 어둠을 손 잡아주는 다른 어두움의 손 같은 건 볼 수 없었다 - 시집『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창비, 2005) 하루치 분량의 빛이나 한 생애의 박동이나 저문다는 것은 모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