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다우너 / 이성목

모든 2 2018. 6. 17. 16:27

 

다우너 / 이성목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뒷다리의 힘을 풀고 주저앉는다. 인부는 전기 창으로 소를 찔러 일으켜 세우지만 이내 다시 주저앉는다. 오물 진창에 드러누워 다리를 버둥거리는 소를 지게차로 들어 일으켜 세우지만 또 주저앉는다.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 인부는 필사적으로 소를, 살아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게 한다.

 얼마 전 새로 산 구두는 천연소가죽인데도 뒤축이 너무 자주 무너진다. 주저앉은 굽을 뽑고 새 징을 박아 구두를 일으켜 세운다.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 나는 먹고 또 살아야하므로, 필사적으로 구두를 걷게 한다.

 청계광장에, 촛불을 하나씩 받들고 주저앉은, 어린 소는 이제 막 이마에 뿔이 나기 시작했다. 소가 뿔로 땅을 밀고 스스로 끙 일어서기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고요하게 엎드려 짙푸른 생을 되새김질하며 늙어갈 시간이 없다.

 

- 월간 <스토리문학> 2009년 2월호 -

 

 

 ‘다우너’라는 정겹진 않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단어와 ‘오물 진창에 드러누워 다리를 버둥거리는 소’라는 대목에서 지난해 도축장 앞의 풍경을 담은 한 외국 동영상이 선연하다. 그리고 얼마 전 국내에서 주저앉는 젖소를 불법 도축해 유통시킨 일당이 적발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바도 있다. 기립불능의 젖소를 제때 신속하게 브로커에게 넘기지 않으면 농가에서 죽을 수 있다. 죽게 되면 농민들이 자비를 들여서 매몰처분 해야 되는데, 돈을 주고 사가려고 하는 브로커에게 소를 넘기는 것은 어쩌면 이 불황의 축산농민들에게는 안 되는 일이기는 하나 가능한 선택이기도 하겠다는 동정심마저 든다.

 

 소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동물이며, 우리 인간에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다 주어 버릴 것이라고는 하품 밖에 없는 가축이다. 도축장에 끌려 들어가기 전에 발버둥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살아서 인간을 위해 바친 시간도 모자라 도륙되어 온몸이 찢기어 팔려나가는데 고분고분하기만을 바란다면 너무 몰인정하지 않은가. 도축도 전에는 망치로 양미간 급소를 단 한방에 쳐서 기절시킨 후 목을 따서 피를 빼고 해체하다가 최근엔 망치를 사용하지 않고 전기충격을 사용한다고 한다. 근육이 경직되어 고기 맛이 살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게 해주자는 자비로운 배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소의 입장에서는 개나 닭이나 다 웃을 노릇이다.

 

 나는 문득 여중생 집단으로부터 시작된 청계광장의 촛불들이 소를 귀하게 여기고 소에 대한 애정과 우정이 충만한 ‘친소적’ 사람들의 무슨 ‘소권’에 대한 염원이 아니었을까 라는 착각을 했다. 하지만 그 촛불의 관심과 소망은 오로지 맛나고 질 좋은 고기를 먹어야겠으며, 먹고 말겠다는 끈끈하고 도드라진 육욕일 뿐 그들의 외침은 인간과 소에 대한 본질적 관계와는 아무런 관련도 배려의 의미도 없다. 이토록 인간의 사랑이란 얼마나 제한적이고 이기적인가. ‘워낭소리’를 보고 나오면서 그 생각이 더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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