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웅의 달시 19

실크로드의 달

실크로드의 달 어렸을 적에는 여기 저기 참 많이도 기웃거렸지. 우르르 몰려다녔지. 가만히 혼자 있지를 못했어. 답이 밖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이름을 알리고 싶었고 알려진 이름들을 만나고 싶었지. 부러웠지. 그래서 내 것이 없었어. 허전했고 외로웠어. 불안감 때문에 그랬을 거야. 미래에 대한 불안감, 먹고 사는 것에 대한 불안감, 그 불안감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안에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어. 사람, 관계, 일 그 모든 것이 밖에 있었으니까 밖으로만 다녔지. 더 불안했어. 불안해서 만나고 또 만나고 웃고 떠들고 돌아와도 마음은 늘 허전했어. 고요하다는 것, 그 조용하고 정지해 있는 듯한 그곳에 나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해. 이제 세상을 막 떠난 한 사람이 머물고 있는 평온한 슬픔 ..

권대웅의 달시 2023.10.12

멀어서 아름다운 것

멀어서 아름다운 것 / 권대웅 달이 쓰고 가는 저 기러기와 기러기가 읽고 가는 저 달의 문체와 기러기의 문장이 이어져 가을밤이 된다. 길밖의 기러기와 길안의 달 우리는 늘 서로 그렇게 만나지 못하고 가을이 되면 묻는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가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자꾸 해결하려 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해.풀려고 할수록, 말하고 떠들수록 더 꼬이게 되는 경우가 있어. 그냥 내버려두는것, 가만 두면 저절로 풀리게 되는 것 같아. 어떤 문제나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면 순간 뇌가 판단해서 지시하는 답을 나는 곧바로 따르지 않으려고 해. 내 판단에 오답이 많았기 때문이야. 나는 내가 아니 인간이 배워온 이성적 판단을 믿지 않는 편이야. 우리의 삶은 유화나 페인트칠이 아닌 번짐, 스며들어 배어나..

권대웅의 달시 2023.10.12

아득한 한 뼘

아득한 한 뼘 / 권대웅 달은 경계가 없어, 내가 이곳에서 보는 달과 당신이 저곳에서 바라보는 달이 같으니 우리는 모두 한 동네야. 한국, 일본, 중국, 미국, 프랑스, 아르헨티나... 지구 위에 경계가 그어진 그 어느 나라에서 보아도 달 아래 인류는 모두 한 동네야. 비단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달뿐만이 아니라 아주 오랜 옛날 사람들이 밤이면 바라보았을 달을 생각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긴 달빛의 끈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아. '바라본다'라는 말은 '그리워하다'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닐까. 북간도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바라보던 달,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며 바라보던 달, 그런 그리움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 그리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쉽고 보고싶고 쓸쓸하고 슬프고 애타는 것들이 합쳐진 마음 그 ..

권대웅의 달시 2023.10.12

모두 사라지는 것들

모두 사라지는 것들 / 권대웅 집 앞 마당에 서 있던 해바라기가 사라졌어. 불이 득실한, 아주 넉넉한 웃음을 가진 듯 생긴 둥근 해바라기였는데 담장 아래 고개를 푹숙이고 있다가 그만 팔월 그 여름의 태양을 따라 갔나 봐. 허전했어. 아침저녁으로 창문에서 바라보던 꽃이었는데. 해바라기가 유독 키가 커서 그랬지 사라진 것은 비단 해바라기 꽃만이 아니었어. 봄, 여름, 가을, 매 계절마다 피었다가 사라지는 꽃들을 보고도 우리가 영원할 줄만 알다니, 언젠가 사라질 것을 잊고 있다니, 나도 당신도 사라져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 높고 멀어져 가는 하늘 위로 뭉게뭉게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어. "Everything will be taken away" 몇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에 갔다가 흑백사진 위에 씌여져 있는 ..

권대웅의 달시 2023.10.12

달의 고요

달의 고요 / 권대웅 비가 오고난 후 여름밤 하늘에 뜬 달을 보면 참 고요하고 환한 연못 같아. 저것이 바로 명상이지. 경전經典이지. 달에 적힌 저 경 經을 봐. 달빛이 읽고 있는 경 經을 들어 봐. 그 달이 비추는 지상의 연못에 연꽃이 피어나고 있어. 후드득 연꽃이 날아가 달에 닿고 있었어. 누가 놓고 가는 생일까. 이제 막 떠나가는 순간과 탄생하는 순간이 겹쳐지는 시간에 닿는 것 같은 달의 고요. 달팽이가 아득한 은하수를 건너가고 있었어. 배낭을 맨 여행자 푸른 구름들이 잠시 달에 짐을 풀고 머물고 있었어. 연못 속에 비친 달을 찾아 한평생을 가는 달팽이처럼 우리 삶이 그런 것 같아. 있으면서도 없는 것, 보이면서도 잡히지 않는 것, 존재하면서도 없어지는 것, 언젠가 모두 사라져 가는 것을 향해 우리..

권대웅의 달시 2023.10.12

둥글어지는 것

둥글어지는 것 / 권대웅 비가 내리는 소리는 자연이 연주하는 음악 같아. 가만히 빗소리를 들어봐. 비가 부딪히는 곳마다 서로 다른 빗소리들을 들어봐. 통통통 처마 밑에 놓은 깡통에 부딪히는 빗소리. 두둑두둑 나뭇잎에 부딪히는 빗소리 톡톡톡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 하늘에서 내려오는 빗방울이 어디에 부딪히느냐에 따라 그 음향과 질이 달라지듯이 우리도 어느 곳에서 누구와 부딪히고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소리도 달라진다는 생각을 했어. 당신은 지금 어디서 누구와 만나서 어떤 소리를 내고 있니? 빗소리가 둥글다고 생각했어. 아니 이 세상에 오는 모든 것들은 둥글어지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동그란 몸짓을 지으며 꽃들은 피어나고 열매는 자기 몸이 매달려 있을 동그란 자리를 허공에 만들고 둥근 알에서 날개를 둥글게 퍼..

권대웅의 달시 2023.10.12

달 항아리 꽃

달항아리 꽃 / 권대웅 비가 그치고나자 마지막 피어난 꽃이 후드득! 저 달의 못에 가 닿는다. 고요하다. 그렇게 또 한 봄이 끝난다. 한 생이 건너간다. 이 세상을 살면서 내가 듣고 보았던 모든 말, 풍경, 기억들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 고! 요! 하! 다! 달에게로 간 꽃처럼... 그래서 나는 때로 어떤 말 앞에서도 고요하고 어떤 풍경 앞에서도 고요하다. 108개의 달항아리를 그리고 있어. 고요한 달항아리 속을 듣고 싶었어. 달항아리 속에 존재의 비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문득 그 안에 달이 있을 것 같았어. 둥글고 아름답게 빚어진 달항아리의 자태 말고 그 안의 둥근 공간 말야. 그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보일까, 내가 인간의 씨앗으로 형성되어 이 세상으로 오고 있는 것, 그 너머 무..

권대웅의 달시 2023.10.12

모과 나무가 있던 집

모과 나무가 있던 집 / 권대웅 모과꽃이 피던 봄이었어. 이 세상에 분홍빛으로 피는 꽃 중에서 나는 모과꽃이 제일 예쁘더라! 봉오리가 맺힐 때는 빨갛게 가깝고 꽃이 피면 분홍에 가까운 그 모과꽃 향기를 밤에 맡으면 마치 그것이 달향 같다는 착각이 들어. 가출하고 싶어. 그런 봄이었어. 모과꽃이 피어나는 창가에 누워 잠을 자다가 빗소리에 벌떡 일어나 엉엉 울었지. 자다가 전생이 스쳐 지나갔던 거야. 꿈인 줄 알았는데 꿈 속인 줄 알았는데 아주 오래 전 뭉게구름 너머 하늘 저 언덕배기 모과나무가 있던 집 마당이 떠올랐어. 잠깐 다녀온다 하고 집 앞 길모퉁이를 한 번 돌았을 뿐인데, 꽃이 지는 길을 지났을 뿐인데 그만 까무룩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시간을 잊어버렸던 거야.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나는 어디서 무..

권대웅의 달시 2023.10.12

봄 달이 뜨는 이유

봄 달이 뜨는 이유 / 권대웅 봄이 왔어, 봄이, 당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러나 결국 보지 못하고 떠난 그 봄이 왔어. 인간의 걸음으로 걸어서 태양까지 가는데 4천 년이 걸린다지. 그 먼 거리에서 달려온 햇빛 하나가 간신히 내 이마에 툭 쓰러지며 말했어. 봄이야! 그 말 하나 하려고, 그토록 먼 곳에서 온 것은 아니겠지. 새순처럼 여리고 가늘어서 더 눈부신 햇빛을 바라보다가 눈물이 났어. 봄이 오는 이유 말이야. 자연에도 선의지(善意志)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마음 속에서 옳다고 믿어 그에 따라 행하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다는 의지.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말했지. '밤하늘에 빛나는 신의 질서인 별과 내 가슴에 샘솟는 선의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봄이 오는 이유가 선한 의지 때문이듯이 우리 ..

권대웅의 달시 2023.10.05

우크라이나의 달

우크라이나의 달 / 권대웅 질량불변의 법칙이 있어. 물질이 화학 반응에 의해 다른 물질로 변화하여도 반응 이전과 반응 이후의 질량이 변하지 않고 일정하다는 법칙이야. 즉 물질이 사라지거나 무에서 물질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변형만 있다는 것이야. 종이 한 장을 태우면 종이는 없어지지만 재와 먼지로 남아 있다는 것처럼 말이야. 물질物質만 그럴까. 감정感情도 그래. 마음에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한 강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면 오랜 시간이 지나 감정이 변하거나 누구려졌어도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더 기운을 가진 감정으로 남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지. 작용하고 있다는 것 말이야. 어떤 현상이나 운동을 일으키고 사물이나 사람에게 변화를 가져다주고 영향을 미친다는, 그 작용作用말이야. 이 세상에서 사라진 ..

권대웅의 달시 2023.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