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48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50) 피터 브뤼겔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ㆍ혁명적 크리스마스 올 크리스마스엔 눈이 올까요? 저 그림처럼 천지가 눈으로 덮일까요? 서울에서의 저런 눈은 악몽일 텐데, 꿈속에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길몽입니다. 마음속에서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별이니까요. 저 그림은 얼핏 보면 손으로 카드를 그려 보내던 시절의 카드 풍경 같지요? 브뤼겔의 유명한 그림 ‘베들레헴의 인구조사’입니다. 브뤼겔이 저 그림을 그릴 당시 플랑더스는 끔찍할 정도로 추웠다고 합니다. 그러니 저 그림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낭만을 그린 게 아니라 아름다움 이면의 거칠고 혹독한 세상을 그린 것입니다. 제목으로 봐서는 베들레헴에서 실시됐던 인구조사를 그린 그림이지요? 누가복음은 그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 가이사가 영(令)을 내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고향으로 돌아가매,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9) 폴 고갱, ‘과일을 들고 있는 여인

ㆍ그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고갱은 이렇게 썼습니다. “태양처럼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이 아름다워 자꾸만 쳐다봅니다. 여인의 맨발을 보고, 나도 맨발이 됩니다. 햇빛을 머금은 나무의 향기를 맡으며 맨발로 온 들을 거닐었습니다. 여인이 그립습니다.” 저 여인 같지요? 감수성이 예민하지 않아도 저 여인의 눈빛은 지나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중심이 있는 자의 차분한 눈빛, 자신을 보는 이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눈빛!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그 눈빛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고갱의 다른 그림의 제목을 되새김질하게 됩니다. 그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타이티에서 고갱의 그림은 그 한 문장으로 수렴됩니다. 고갱은 왜 훌훌 털고 타이티로 들어갔을까요? 분명 고갱이 그린 타이티는 ‘고갱’의 타이..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8) 마르크 샤갈 ‘떨기나무 앞의 모세’

● 체념의 시간에 만난 신 렘브란트의 밧세바는 고뇌하는 여인인데, 샤갈의 밧세바는 행복하게 다윗과 융화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샤갈은 부끄럼 없는 순결한 사랑의 힘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또 렘브란트의 모세는 심각한데, 샤갈의 모세는 온화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들어왔던 성서의 이야기가 나이 들면서 열매 맺은 방식은 그만큼 달랐던 거겠지요. 어린 시절부터 성서의 이야기에 매료되었었다는 샤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서는 자연의 메아리와 같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전하고자 했던 비밀이었습니다.” 저 샤갈의 모세를 보십시오. 여성성이 잘 발달된 부드러운 남자 아닙니까? 당신의 모세는 어떤 사람인가요? 나의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한 민족의 지도자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까지 성급했고, 상처 입었고, 무..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7) 조지 프레더릭 왓츠 ‘희망’

● 누가 너를 위로해 주나 저 소녀, 각박한 현실에 뒤통수를 맞았을까요, 냉정한 사랑에 상처 입었을까요? 어찌 됐건 지독한 상실감에 세상과 맞서지도 못하고 세상 밖으로 도망 나와 자기 자신 속으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남루하지만 소녀의 옷이 섬세하기도 하지요? 누추한 옷이지만, 어떤 화사한 옷보다도 소녀를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작가는 단애의 끝에서 통곡도 잊은 채 지칠 대로 지쳐있는 소녀의 마음과 공명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작가는 꿈을 잃어버린 아픈 자리에서 보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걷지도 않고 맨 발의 곡옥(曲玉) 자세로 현이 끊어진 수금에 고개를 기대고 있는 소녀의 마음을 알고 느끼고 사랑하고 있는 거지요. 악기는 사람을 닮습니다. 현이 끊어진 수금은 바로 저 소녀의 마..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6) 에드바르 뭉크 ‘절규’

● 차라리 울지 운명이라는 게 있지요? 우연하고 무심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서는 좋든 싫든 엄청난 사건을 만들어 놓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런 놈! 어쩔 수 없는 사태에 대해 무기력하기만 했던 젊은 날엔 그런 운명이란 놈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내가 절대로 좋아할 수 없었던 작품이 저 작품, 뭉크의 ‘절규’였습니다. 아마도 나는 그 절규의 느낌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애써 외면한 것이겠지요.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귀를 막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남자가 끔찍했습니다. ‘어휴, 저런 그림은 공짜로 줘도 내 공간엔 걸어놓을 수 없겠구나. 차라리 울지, 서럽게 울어버리지, 그랬더라면 희망의 불씨라도 보았을 텐데…. 뭉크는 왜 저런 그림을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5) 장 프랑수아 밀레 ‘접붙이는 농부’

ㆍ네 배나무를 접 붙이거라! 이상하지요? 밀레의 저 그림은 돌아가시기 직전의 할머니를 연상시킵니다. 할머니는 치매였습니다. 종종 피난보따리를 쌌고, 또 종종 할머니보다 10년 먼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무엇보다도 호불호가 명확해졌습니다. 싫은 사람은 아파트 문턱에서 쫓겨났고, 좋은 사람은 돌아가기 힘들었습니다. 하루 하루가 전쟁이었습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처럼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공격적이 된 할머니가 예전에 그 화초를 좋아하던 심성 고운 할머니로 돌아온 것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그 날 할머니의 시선이 머문 곳은 베란다에서 크고 있는 큰 화분이었습니다. 가지 꺾인 나무를 한참 바라보며 만져주던 할머니는 실패를 찾으시더니 조심스럽게 가지의 꺾인 부분을 실로 꿰맸습니다. 마지막..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4) 빈센트 반 고흐 ‘선한 사마리아인’

ㆍ누가 이웃인가? 운명에는 목격자가 있고, 목격자의 운명이 있습니다. 혹 상처 입고 쓰러져 위기를 맞고 있는 누군가를 목격하신 적 없으신가요? 그 때 어떻게 하셨나요? 포대기에 쌓인 아기가 길가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아기의 목숨이 위태롭기만 한데 한 사람, 두 사람…, 마침내 열일곱 번 째 사람이 그 아기를 지나칩니다. 보고도 못 본 척 그냥 지나치는 사이 아기는 목숨 줄을 놓아버렸습니다. 얼마 전 중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어찌 중국만의 문제겠습니까? 나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내가 이웃의 위기에 무디고 무딘 피폐한 영혼이고, 그럼으로써 나의 위기에도 아무에게도 손 내밀 수 없는 고립된 영혼인지도 모른다고. 그 상황에 떠오르는 그림이 바로 고흐의 ‘선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분위기가..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3) 귀스타브 쿠르베 ‘상처 입은 남자’

ㆍ총 맞은 것처럼! 눈은 마음에 창이지요? 화가 나면 열이 눈으로 올라오고, 불안하면 눈빛이 흔들립니다. 사랑에 빠지면 눈빛이 부드러워지고, 안정적인 사람은 눈빛이 맑습니다. 총 맞은 것처럼, 아니, 저 그림의 남자처럼 칼 맞은 것처럼 가슴이 아프면 어떤 눈빛일까요? 쿠르베의 ‘상처 입은 남자’는 쿠르베의 자화상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감고 있기는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저 남자의 눈매, 매력적이지요? 묘합니다. 저 눈매는 상처 때문에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의 눈매가 아닙니다. 저 남자, 상처를 오히려 소중한 연인인 양 느끼고 있나 봅니다. 의연하게 상처를 품고 있는 남자의 고통스러운 평화가 단박에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적인 작품이 바로 저 작품, 쿠르베의 ‘상처 입은 남자’입니다. 쿠르베의 자화상을 볼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2) 번 존스 ‘코페투아왕과 거지소녀’

ㆍ황금보다 귀한 꽃 스티브 잡스의 매력은 돈이 아니지요? 편리한 컴퓨터 세상도 아니고, 끝없는 혁신도 아닙니다. 그의 매력은 직관입니다. 그는 직관을 따라 산 자, 직관이 살아있는 자였습니다. 나는 잡스를 돈이 덫이 되지 않은 경영자로, IT업계 황제라는 왕관이 덫이 되지 않은 인간으로 기억합니다. 저 그림은 화려한 왕관을 내려놓는 자의 고뇌를 담고 있습니다. 그림은 낭만적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초라한 거지소녀를 사랑해서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왕관을 내려놓고 있는 왕을 그리고 있으니까요. 지금 사랑 앞에서 쩔쩔매는 저 왕은 원래 여인에게 관심이 없었다지요? 여인에게 관심이 없는 남자, 얼마나 편안하게 살았겠습니까? 그러나 또 얼마나 삭막하게 살았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얼마나 삭막한지도 모른 채 황..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1) 폴 세잔 ‘수욕도’

ㆍ스승을 거쳐, 스승을 넘다 음악도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라면서요? ‘부활’의 김태원씨의 말입니다. 찬찬히 김태원씨의 태도를 살펴보면 그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체현하고 있는 진정한 멘토입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진리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입니다. 스승이란 진리를 파는 장사꾼도 아니고, 진리를 나눠주는 자원봉사자도 아닙니다. 스승은 스스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승은 산파와 같습니다. ‘나’는 스승의 도움으로 내 안의 진리를 발견하고 낳아야 합니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김태원씨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보여줬던 그 태도! “내가 그대를 키운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 스스로 일군 것이다. 나는 다만 그대 곁에 있었을 뿐!” 그대라는 늙은 말이 그에게는 어찌 그리 싱싱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