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48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0)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

ㆍ고독을 잊게 하는 붓 끝의 산 인간은 빵으로 살고, 재능으로 죽는 거라며 화를 낸 사람은 세잔의 아버지였습니다. 그 말만 들어도 알겠습니다. 세잔의 아버지가 얼마나 완강하고 무서웠는지를. 자수성가형의 강한 아버지는 배고픈 화가가 되고자 하는 아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겁니다. 재능으로 죽어도 미련 없이 죽을 수 있는 일의 행복을 인정해주기에는 가족이 너무나 보수적이고 너무나 가깝지 않나요? 세잔이 가족의 환영을 받지도 못하면서 가슴 속에 묻어버리지도 못하고 꺼내 키워야 했던 그림의 불씨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말년에 생 빅투아르 산을 그린 그림을 보면 선명해집니다. 저 그림은 세잔이 그린 생 빅투아르 산 그림들 중의 하나입니다. 산과 하늘과 숲과 성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지요? 움직이지 않는 산과 성이 움직..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39) 앙리 루소 ‘잠든 집시여인’

ㆍ달빛 한 줌, 지팡이 하나 천국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기보다 지옥에서 홀로 살기를 선택하겠다고 고백한 이는 소로였습니다. 소로는 월든 숲속에다 오두막 한 채를 짓고 스스로 밭을 일궈 먹으며 평생을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40대 후반의 나이에 갑자기 찾아온 폐렴에 걸려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어도 나는 그가 불쌍하거나 안됐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고독이 불안하거나 무섭지 않은, 아니 고독이 ‘나’의 집인 현자였을 테니까요. 저 그림 앙리 루소의 ‘잠든 집시여인’을 보는데 왜 단순하고 담백하게 살다간 소로가 생각이 나는 걸까요? 아마 보이는 것이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일 것입니다. 한 벌의 옷, 지팡이 하나, 만돌린 하나, 물병 하나! 신발도 없는 것이 그녀가 얼..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38) 앙리루소 ‘뱀을 부리는 여자’

ㆍ달의 노래, 뱀의 춤! 릴케는 노래했습니다. 사랑은 햇살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온다고. 그런데 앙리루소의 저 그림 ‘뱀을 부리는 여자’(1907년, 캔버스에 유채, 169×189.3㎝, 오르세 미술관, 파리)를 보면 사랑은 달빛을 타고 오는 것 같습니다. 저 그림에서 달이 없다면…? 숲은 얼마나 적막했을까요? 여인은 피리를 불지도 않았을 거고, 그렇다면 뱀도 춤을 추지 않았겠지요? 그나저나 이번 추석에 보름달은 보셨나요,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비셨나요? 달을 보면, 꽉 찬 보름달을 보면 괜히 기원하게 되지요? 루소의 그림을 보니 그 기원은 뜨거운 눈물이 빚은 결핍의 절규가 아니네요. 보름달이 자극하는 것은 심장이어서 거기서 생겨나는 기원은 심장의 두근거림에 걸맞은 것입니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37)마티스의 ‘원무’

ㆍ텅 빈 충만의 춤 무엇을 할 때 자유를 느끼십니까? 무엇을 할 때 가슴이 뻥 뚫리고 호흡이 편안하신가요? 마티스의 ‘원무’는 춤을 출 때 자유로운 여인들을 그렸습니다. 한번 보고 나면 자꾸자꾸 떠오르고 자꾸자꾸 보고 싶은 연인 같은 그림입니다. 그림은 참 단순합니다. 하늘과 땅과 춤추는 5명의 여인들! 색도 단순합니다. 푸른 하늘, 녹색의 대지, 신명 속에 있는 땅 색의 여인들!(앙리 마티스 ‘춤’. 1910년, 캔버스에 유채, 260x391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왜 중세철학자들이 신적인 것일수록 단순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직관이 뛰어나지 않으면 단순미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앙리 마티스,춤,1009~10(슈추킨을 위한 춤) 마티스의 스승은 모로입니다. 오르페우스를, 살로메..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36)렘브란트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

ㆍ에로스보다 진한 우정 종종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을 봅니다. 다윗이 누구에게나 빛나는 생의 주연이었다면, 요나단은 생각할수록 빛나는 조연이었습니다. 다음 대에 왕이 되어야 할 왕자로서 요나단은 자기보다 빛나고 있는 친구 다윗을 질투할 만도 한데 그는 오히려 아버지의 질투로부터 친구 다윗을 보호하고, 다윗을 위로하며, 다윗과 깊은 우정을 나눈 인간 중의 인간이었습니다. 렘브란트의 저 그림은 사울왕의 질투로 목숨이 위태롭게 된 다윗을 요나단이 사울왕 몰래 빼돌려 떠나보내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그림입니다. 정면으로 보이는 남자가 요나단입니다. 친구를 위로하는 따뜻한 손이 듬직합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생각보다 나이 들었지요? 우정을 아는 듬직함을 그리기 위해 렘브란트는 요나단의 표정에 나이를 입혔나 봅니다.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35) 오츠드슨 '아기 도련님'

ㆍ당신은 사랑받고 자랐습니까 아이는 생각보다 눈치가 빠릅니다. 누울 자리를 보지 않고는 발을 뻗지 않습니다. 영국 화가 오처드슨이 그린 ‘아기도련님’을 보십시오. 아기 기분이 참 좋은 것 같지요? 아기가 저렇게 엄마가 부쳐주는 부채에 반응하며 천사처럼 노는 건 아기의 마음을 읽어주는 엄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라는 말에서 권위를 벗기면, ‘엄마’ ‘아빠’가 됩니다. “엄마” “아빠”라는 말은 지극한 사랑의 말입니다. 지금 저 상황의 아기가 무의식적으로 가장 빨리 배우게 되는 바로 그 말도 “엄마”일 것입니다. 그 말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가슴에서, 배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말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말이기도 합니다. 그림 속 엄마와 아기의 관계를 보십시오. 저 시절 누가 있어..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34) 마네 '풀밭 위의 식사

ㆍ더없이 편안한 자세 사랑보다 명예가 중요한 사람들은 사랑 앞에서도 겉치레의 옷을 벗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옷을 입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거나 비난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모독하면서 괜찮은 척 살아가고 있는, 마음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는 발표되었을 당시(1863),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작품입니다. 프랑스 사회는 저 그림을 불편해하고 증오했습니다. 마네는 오명으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왜 저 그림으로 파리가 발칵 뒤집혔는지 이해되지 않습니까? 신사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부끄러움도 없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저 여인! 나는 생각합니다. 저 ‘풀밭 위의 식사’나 ‘올랭피아’ 같은 마네의 그림들은 그 시대의 위선을 고발..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32) 르누아르 '빨래하는 여인들'

ㆍ빨래의 내공 노르웨이의 테러범 브레이비크는 돈을 주고 여성을 사서 잠자리를 한 적은 있어도 정서적인 교류를 해본 여자 친구는 없었다지요? 엄청난 일을 저질러놓고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남자의 그 파괴적이고 뒤틀린 심성 뒤엔 여성혐오증이 있었습니다. 여자를 좋아하세요? 좋아하면 살피게 되고, 잘 지내게 되고, 보살피게 되지요?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면 여자들이 행복해합니다. 책을 읽고 있든, 피아노를 치든, 춤을 추든, 목욕을 하든, 빨래를 하든 여자들이 하나같이 부드럽고 하나같이 빛납니다. 르누아르는 여자를 좋아한, 여자와 잘 지낸 남자 같습니다. 저 그림은 ‘빨래하는 여인들’인데, 이제 막 빨래를 하려고 소매를 걷어올리고 있는 저 여인, 르누아르가 좋아한 여인 같지 않습니까? 뒷짐을 지고 신사..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31) 모네'수련 연못'

ㆍ우주가 깃든 한 송이 꽃, 수련 처음 연꽃을 보고 놀란 곳은 실상사에서였습니다. 연못에 연꽃이 시들어 꽃 피는 시기가 막 지났구나, 하며 아쉬워했는데, 다음날 아침 찬란히 피어나는 연꽃을 보았습니다. 연꽃이 햇살에 반응하며 살아나는 거였습니다. 소르르 소름이 돋았습니다. 꽃의 매혹! 그 무덥던 날, 얼마나 오랫동안 망연히 연못을 바라봤을까요. 폴짝거리며 연잎 사이를 뛰어다니는 개구리는 물수제비를 만들고, 바람이 불면 물결이 생기는데, 눈부신 햇살은 존재하는 모든 것 위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맑고 투명하고 화려하게 빛났습니다. 그 세상에 여왕처럼 도도하게 자태를 드러내는 연꽃! 햇살이 내리고 바람이 부는 연못은 하나의 완전한 세계였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꽃은 아름답다고 찬사를 보낸 후 꺾어도 되..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30) 고흐 '해바라기'

ㆍ해를 등진 해바라기 진정으로 사랑을 나누는 존재를 솔메이트(Soulmate)라고 하지요? 솔메이트는 나를 나 되게 하는 존재입니다. 해바라기의 솔메이트는 태양, 태양입니다. 박두진의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는 해바라기가 사랑한 해일 겁니다. ‘해바라기’라는 말, 참 예쁘지요? 해를 바라 해바라기, 아닙니까? 그 말은 영어의 선플라워(Sunflower)보다 훨씬 은유적입니다. 해바라기의 노란 잎은 해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환희의 흔적일 겁니다. 그 노란 음에 도달하기 위해 고흐는 그렇게 많은 해바라기를 그렸나봅니다. 저 해바라기(1887년, 캔버스에 유채, 43×61㎝,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는 노란 음으로의 여행의 첫발이랄 수 있는 해바라기입니다. 두 송이의 노란 해바라기가 별밤 같은 배경의 터키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