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41

눈은 내리고, 길 떠나는 형에게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마지막회 사진출처=pixabay.com 형은 병원 현관의 넓은 창으로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형은 한 달 전부터 배에 복수가 차기 시작했고, 복수는 빼기 무섭게 다시 차올랐다. 내내 통증을 호소하는 형에게 병원에선 링거 영양제와 진통제를 주사하는 것밖에는 다른 처방을 내리지 않았다. 부어오른 팔에 반복되는 주사와 링거주머니를 형은 지겨워했다. 형은 답답한지 입원실 문을 자꾸 열어놓으라고 청했고, 퇴원하던 날은 형수가 수속을 밟는 동안에 서둘러 병원 로비로 나왔다. 현관 유리 너머로 방금 내리기 시작한 눈발이 주차장을 하얗게 덮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내리는 굵은 눈발이다.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며 차가운 공기를 실어 나르고 있었는데, 형은 고개 한번 돌..

능길 사는 선희 누나, 땔감 해줄 남정네도 없이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40 귓전에 음악소리가 들린다. 휴대전화에 입력된 모닝콜이 울리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선율이라도 기계음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그 덕분에 눈을 뜨면 아직 아내와 아이는 자고 있고 창문 밖은 여전히 컴컴하다. 알람을 끄고 다시 눕는다. 담요 밑에 손을 넣어보고 남아 있는 온기에 감사하며 다시 잠이 든다. ‘겨울은 노동하는 인간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신념을 재차 다짐하는 시간이다. 어느 책에선 겨울에는 동물이나 사람이나 일찍 잠자리에 들고 늦게 일어나는 게 자연의 순리에 맞는다고 적어놓았다. 지당한 말씀이다. 방안에 햇볕이 깊숙이 배어들어오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고, 그래도 따뜻한 온돌에 대한 예의상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는..

뜰에, 마음에 불꽃나무 한 그루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9 가을걷이가 끝나고 처마에는 수수와 시래기를 만드느라 무청이 걸렸다. 가을농사라 부르는 마늘과 양파 모종도 심었고, 겨우내 얼지 말라고 그 위에 볏짚도 깔아주었다. 새로 이사올 후배의 집은 거의 다 짓고, 도배만 남겨두고 있다. 농사와 집을 짓거나 고치는 일은 지난 4년여 시골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사람이 먹고사는 바탕이 되는 것이기에 특별한 정성이 필요하다. 누군가 ‘일은 노동·작업·근로 등의 낱말과 달리 몸과 마음이 온전히 하나가 된다는 뜻에서 일’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생계 때문에 또는 취미로는 ‘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을 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으며, 반편 인생을 사는 셈이 된다. ..

‘인연의 길이’만큼 중요한 것은 ‘인연의 거리’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8 처서도 지나고 밤낮으로 기온 차이가 크다. 융성하던 초록빛 산색이 어느 구석에선가 서서히 가을을 준비하는지 은밀히 웅성거리는 것 같다. 제법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이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다고 느끼며 마루에 앉아 있는데, 아이는 싱크대 앞에 제 변기를 끌어다 놓고 올라가 설거지를 하고 있다. 엄마가 하는 일이라면 저도 한사코 하고 싶은 모양이다. 처음엔 귀찮아서 말리다가 이젠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그냥 내처 두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꿨다. 서로 마음 끓이지 않고 그편이 아이 마음도 채워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종이접기를 해도 엄마가 가르쳐 주는 대로 하지 않고 제 맘대로 종이를 구겨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는, 어쩌다 ‘금지’에 부딪치고 호되게 야단맞으면 그..

공사장 잡부로 일하며... "고통은 구체적이다"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7 열흘쯤 전에 시골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친구가 초대해서 회남에 다녀왔는데, 그 집 현관 앞에 손바닥 반절 크기의 시멘트 블록들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 친구 체구만큼 앙증맞은 블록을 보고, 이게 원래 뭐하는 데 쓰는 거냐고 물었더니 공사장에 버려져 있기에 가져다 놓았다고 한다. 그것도 하나의 전조였던가. 한 주일 뒤에 그 녀석의 쓰임새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다리 신축공사장에서였다. 요즘 아랫마을은 지난해 수해로 망가진 천변에 둑을 쌓고, 무너진 다리를 다시 신축하느라고 온통 공사판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농사일이 한가해지면 일당을 받고 공사장 잡부로 일한다. 농부들이 현금을 만질 수 있는 기회는 가을 수확기가 아니면 힘들고, 한푼이라도 벌어야 한다..

맞고 오는 아이보다 때리고 오는 아이가 낫다는데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6 올해는 논농사를 짓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웃들이 서둘러 못자리를 하는 걸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새로 시작한 예술심리치료 공부에 시간을 더 내려고 마음먹은 것인데, 그래도 우리 먹을 쌀은 거두어야 한다는 명분에 마음이 흔들렸다. 실은 농협 하나로 마트에서 20킬로그램짜리 쌀을 살 때마다 들었던 자괴감을 피하기 위해서, 비록 예년보다 반으로 줄이긴 하였지만 논농사를 짓기로 했다. 그러나 농사 규모가 크든 적든 매년 겪는 걱정이 똑같이 반복되었다. 이른 봄엔 비도 많이 오더니, 막상 모내기철이 다가오자 3주째 비가 내리지 않는다. 계곡물도 가늘어졌고, 이리저리 호스를 대서 물을 받으면서 마음이 답답해졌다. 어찌 되었든 물을 제대로 가두려면 논둑을 발라야 한다. ..

내 삶을 다스리실 분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5 신앙인아카데미에서 ‘자연과 몸’이란 주제로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서울에 다녀왔다. 학문적 영역과 거리가 멀어진 지 오래되어서인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지 불안한 심경으로 길을 나섰다. 산천을 바라보는 몸 가진 사람의 감회를 조금 나누었는데, 뒤풀이를 가면서 다짐했다. 다시는 이런 주제 넘는 강의를 맡지 말아야지. 뒤풀이 장소에서 우린 생맥주를 마셨는데, 자리를 마련한 이의 누님이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수녀라고 했다. 지금은 칠레인가 어디서 선교하는데, 조만간 한국에 다니러 오면 한번 만나자는 이야기가 오고갔다. 거리에서 마약 하는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는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수도회 수녀들은 ‘가르치지 못한다’는 회칙을 갖고 있..

우리가 우리에게 선물처럼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4 아이가 잠이 들면 우리도 잠잘 준비를 해야지 하며 봄이라지만 아직 추운 산골 흙방에서 아내와 나는 이불을 덮고 눕는다. 보안등도 없는 마을에서 전깃불을 끄고 나면 온 세상이 까맣게 쓰러진다. 달 그림자조차 기척하지 않는 그믐밤이면, 바깥세상이나 방안이나 구별 없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면 소리에 무척 민감해지고,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면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에 잠시 귀를 세우게 될 것이다, 잠이 눈꺼풀을 쓸어 내릴 때까지. 얼마 전에는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아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캄캄한 방안에서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그 사람은 나를 찾아와 줄까? 만일 우리가 죽는다면, 가족들은 제외하고 전..

길수 아저씨가 구해주셨어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3 요즘 결이가 한창 재미있어하는 놀이가 있다. 이불만 펴놓으면 이불 속에 숨자는 것이다. 컴컴한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마치 동굴 속에 숨어든 아이들처럼 재잘거린다. 이불을 뒤집어쓰면 나는 으레 아이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주문한다. 그러면 아이가 항상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토끼가 있었어. 토끼가 막 산에 가다가 물에 첨벙 빠졌거든. 그래서 길수 아저씨가 토끼를 구해주셨어.”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해달라고 조르면 주인공은 할아버지로, 곰순이로 매번 바뀌지만 결론은 똑같다. 물에 빠진 주인공을 길수 아저씨가 구해줬다는 것이다. 길수 아저씨란 아랫집에 사는 나의 동갑내기 친구인데, 몇 해 전 아랫집에 혼자 살던 처녀에게 장가와서 아들 별이를 낳고 ..

아궁이 앞에서 불꽃을 피우는 사제를 생각한다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2 거칠게 또는 부드럽게, 이 사람 걷고 또 걷는다. 주저앉고 싶으면 언제라도 쉬었다 가지. 다그치는 사람 없이 몰아치는 마음 없이 걷고 또 걷는다. 걷다보면, 문득 나는 없고 아이가 있다. 사랑이 옮겨가듯이, 내 목숨도 옮겨가는가? 내 욕심을 거칠게 헐어낸 자리마다 마음을 부드럽게 덜어낸 시간마다 꽃무더기 사태가 나도록 발랄하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한밤중에 목젖이 끈적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저녁에 윗집 아랫집 사람들이랑 오랜만에 맥주에 후라이드 치킨을 먹고 잤더니 입 안에 뭐가 잔뜩 고인 듯하다. 부엌에 들어가 냉수를 한 컵 마시고 입 안을 게워내는데, 창이 해밝다. 어제 아침부터 내리던 눈이 그치고, 하늘은 맑아서 보름달에 비친 눈세상이 그야말로 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