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41

그가 나 대신 비를 맞고 있다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11 서울에서 책을 살 일이 생기면 종로서적·교보문고·을지서적에 간다. 저마다 목 좋은 전철역 근방에 자리잡은 탓이기도 하거니와 책을 사든 사지 않든 세상의 책이란 책이 도서관보다 더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탓이다. 대형서점이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언어를 한군데 모아놓은 것 같다. 그래서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러곤 마음먹고 간 책 한 권, 그리고 값싼 문고판 한 권을 쥐고 나온다. 영성과 가난과 소박함을 주장하고 노래하는 책들도 내 호주머니 사정에 비하면 엄청 비싸고, 그런 책을 볼 때마다 나는 정말 가난을 이야기할 처지도 되지 못한다는 쓸쓸한 감정을 맛보곤 했다. 남의 잔치에 와 있다는 서먹한 뒤끝을 느끼지 않으려..

내 육신의 안녕이 큰 숙제인 것처럼, 구원은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10 오랜만에 내리는 단비다. 광대정 산골의 숲이 짙어지면서 마음이 흠뻑 젖는다. 못자리를 해놓은 산논에 물꼬를 보러 올라갔다. 메말랐던 땅이 젖으면서 흙냄새가 확 끼쳐 오른다. 중국산이라는 보이차를 마실 때 이런 황토냄새가 났던 기억이 난다. 봄가뭄 때문에 아직 논에 물이 차오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허옇던 논바닥이 비에 젖어 암갈색으로 변해 있는 것만 봐도 속이 후련하다. 숨통이 열리는 것 같다. 농부의 마음이 다 그런 법일까? 마늘밭이며 감자밭에 심어놓은 작물이 갈증을 식힌다고 여기니, 내 마음이 그만큼 가벼워진다. 며칠 동안 숲은 생기 가득히 축복 가운데 있었다. 그러곤 생각했다. 도시 살 때 가뭄이 심하면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비가 와야 할 텐데, 올 농사 다..

너에게 기대면 죽음조차 가벼울까?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9 가뭄 중간에 비가 긋고 나자 고사리를 끊으러 숲에 들어갔다. 우선 임도 끝에 있는 논 뒷산을 헤집고 다녔는데, 소문대로 등성이 하나를 넘으니 온통 무덤이다. 어떤 묘소는 지난 한식 때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역력하게 잘 다듬어져 있지만, 군데군데 파 옮긴 흔적이 남아 있는 곳도 있었고,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흙이 패이거나 아예 봉분 위로 잡목이 자라는 무덤도 있었다. 고사리는 양지바른 묘소 주변에 많이 자라는 탓에 ‘고사리꾼’들이 제일 먼저 찾아가는 곳인데, 나 역시 그 주변을 어정거리다가 황폐한 무덤을 만나면 왠지 마음이 신산스러워진다. 멈칫거리다가 무릎을 괴고 고사리를 끊으면서 마음속으로나마 무덤 주인이 마음 상하지 않기를 바라곤 했다. 무덤 주위엔 고사리도 ..

지상에 초대받은 아기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8 게으른 농부가 겨우내 밭에 나가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날 뒷집 처자가 우리 마늘밭을 들러보고 마늘이 꽤 자랐다고 일러주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나가 보았다. 마늘을 덮어두었던 볏짚을 들추어보니 과연 마늘싹이 돋아 손가락 두 마디쯤 솟아 있었다. 그동안 땔감을 해오고 장작을 패면서도 봄이 가까이 오는 걸 생각하면 두 가지 감정이 항상 서로 엇갈렸다. 따뜻한 봄기운이 퍼지면 땔감 걱정도 없어지겠지. 산중에서도 그만큼 땔감 마련이 힘겹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이제 농사를 시작해야 하는데…, 걱정이 앞섰다. 작년에야 첫 농사였던만큼 정신차릴 틈도 없이 일하기에 바빠 걱정할 겨를도 없었다. 사오월에는 해뜨면 밭에 나가고 해지면 괭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에..

와선, 눈도 오시고 하루 쉬자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7 경칩과 춘분이 지나고 내일 모레가 사월인데, 산중엔 눈이 내린다. 이따금 풍경처럼 새소리가 들리고, 마을엔 도무지 인기척이 없다. 문득 이철수님의 ‘오늘은 눈도 오시니 하루 쉬어야겠다’라는 판화가 떠오른다. 겨우내 쉬고 또 쉰다는 말이 쑥스럽지만, 모두 제 복이려니 스스로 다독거리며 안심한다. 감자밭을 일구어야 하는데, 오늘 내일 오늘 내일 미루다가 흰눈을 맞이한 것이다. 밭에 감자알을 파묻고 나면 이른바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되는 것이고, 온갖 밭작물을 다투어 파종하고, 논에 거름을 내고 땅을 갈고 모내기도 해야 할 것이다. 봄에는 해오름에서 해거름까지 일해야 한 해 농사를 그나마 이뤄낼 수 있는 게 농부의 처지이고 보면, 하루 이틀 더 몸을 놀린다 한들 나무..

누군가의 그리운 신발 끄는 소리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6 사진출처=pixabay.com 지난 한 달 동안은 눈속에 파묻혀 지냈다. 요 며칠 봄날같이 반가운 햇살이 비치는가 했더니 이른 봄비가 한번 긋고 지나간 뒤에 다시 눈이다. 흰눈은 햇살만큼 따뜻하고 오히려 맑아서 기분을 좋게 한다. 물론 이건 기분상의 문제지만, 겨울이면 밥 먹듯이 추위를 걱정해야 하는 게 가난한 산촌의 풍경이고 보면 애써 이런 생각을 도모해 보는 것 또한 우리의 지혜다. 언젠가 한 선배가 “산다는 것은 견디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단순히 견딘다는 심경으론 세상을 살아낼 재간이 없다. 죽어버리거나 자포자기로 삶을 팽개쳐 두게 된다. 가끔 서울에 들러 서울역 앞을 서성거리다 보면 언제나 마주치는 궁색한 표정들이 있다. 이들을 행려자라 해야 할..

큰 산 넘어 오시는 임, 꽃 꺾어 그대 앞에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5 한때 이런 적이 있었다. ‘예수’라는 이름을 떠올리지 않고, 그 명호(名號)를 부르지 않고 글을 쓰려고 애쓴 적이 있었다. 디트리히트 본회퍼 목사가 이야기했다던가. 성숙한 세계에선 종교의 비(非)종교화가 요구된다고. 구태여 종교적 체제와 언어가 동원되지 않더라도 만인이 복된 세상에서 복된 생각을 하며 복되게 살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세계에선 말이다. 종교가 대중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아직도 세상이 여물지 않은 탓이다. 아님 그 종교들이 종교(宗敎), 곧 높은 가르침을 선포하는 데 자격미달인 까닭인지도 모른다. 하긴 하나의 종교 안에도 일정한 교리 외에 다양한 인물과 사상과 흐름이 있음을 감안할 때, 그래서 세속사회라는 요즘은 종교와 ..

궤도를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4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나는 집안 형편상 병원엔 자주 들르지 못했다. 그래도 초등학교 6년 동안 단 한 번도 주일학교를 빼먹지 않았고, 마침내 학교에서도 받지 못한 6년 개근상을 성당에서 받았다. 그 당시 내 꿈은 당연히 선생님이거나 신부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 성당에서나 학교에서나 모범생 딱지를 붙이고 싶어했다. 적어도 말썽꾼 소리는 듣지 않아야 했다. 무사히 그리고 당연하게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하자 없이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리고 무리 없이 대학에도 들어가고,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병역의무도 마치고 무사히 대학 졸업장도 받을 수 있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이런 방식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면 취직해서 돈을..

내 영혼의 방범창을 다느라 부지런한 손끝은 가련하다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 사진출처=pixabay.com 해발 5백 고지 산골에 터잡고 산 뒤로 사방이 적막했다. 대여섯 가구 되는 마을 사람들이 밭에 일하러 갈 때나 이따금 들르곤 할 뿐 사람의 기척을 느낄 수 없는 산골은 어쩌면 사람을 그리워하기에 안성맞춤인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무수히 마주치는 낯모르는 사람들 속에 끼여 살면서, 그 틈새를 비집고 실명(實名)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은밀한 기쁨도 좋은 일일 테지만, 전화 한 통화로 손쉽게 외로움을 해결할 수 없는 산중은 그리움을 차곡차곡 마음속에 담아둘 수 있다는, 그래서 속살마저 사람을 반가워할 줄 아는 놀라운 감수성을 지닐 수 있어서 좋다. 이따금 출타하였다가 집에 돌아오면 텅 빈 마을을 볼 때도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죄다 외출하..

눈 오는 날, 아버지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2 사진출처=pixabay.com 낯선 숨결에 머무는 눈길 길섶에도 길바닥에도 화관처럼 피어난 노오란 양지꽃, 사람에게 밟혀도 여지없이 환하게 웃는 그 이들은 티밥처럼 작은 목숨이다. 응시하는 자에게만 화답하는 하느님의 얼굴이다. 마음 없이 스치고 지난 낯선 얼굴들 사이로 문득 떠오르는 한 줌 햇발이다. 그날은 무척 추운 날이었다. 아버지가 손톱 끝부터 새파랗게 변하면서 돌아가셨던 날은 햇살이 투명했지만, 투명한 공기를 가르고 바람이 맵게 불어댔다. 백석에 묘를 쓰고, 삼우제를 지내러 가던 날은 눈이 사정없이 내렸다. 공동묘지 앞산이 절경이었다고 말하면 욕될까? 발목이 푹푹 빠지는 길을 걸어서 아버지 묘에 술을 붓고 돌아왔다. 얼마 전 산골마을에 첫눈이 내리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