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낯선 기억들 29

[김진영, 낯선 기억들] 프루스트와 천상병

평생 사랑할 수 있는 책 한 권을 곁에 지니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나에게도 그런 책이 있다. 그건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 프루스트에 대한 오래된 고정관념이 좀 바뀌었다. 그건 문장 하나를 새롭게 읽으면서부터이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평생 사랑할 수 있는 책 한 권을 곁에 지니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나에게도 그런 책이 있다. 그건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 프루스트에 대한 오래된 고정관념이 좀 바뀌었다. 그건 문장 하나를 새롭게 읽으면서부터이다. 긴 대하소설의 마지막 권인 안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 있다. “… 이제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먼저 통과하지 않으면 다른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전에 이 문장은 프루스트의 고독한 말년과 생의 유한성에..

[김진영, 낯선 기억들] 연탄곡이 흐르는 아침

이제 연탄곡이 흐르는 거실에의 꿈은 완전히 사라진 걸까. 아도르노는 말한다. “연탄곡은 사라졌어도 어느 고독한 사람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홀로 연탄곡을 치지만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의 곁에는 악보를 넘겨주는 한 아이가 함께 있을 테니까.”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방학이 되고 나서 대학생 아이의 아침 일상이 바뀌었다. 아침마다 피아노부터 잠깐 두드리고 나서야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다. 한때 피아니스트의 꿈을 지녔던 아이는 입시에 좌절한 뒤 과감하게 진로의 방향을 바꿨지만 피아노에 대한 애착마저 버린 건 아닌 모양이다. 덕분에 병중의 무거운 마음도 아침마다 들려오는 아이의 피아노 소리로 행복해진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두배로 행복하다. 어쩐 일인지 아내도 건반 앞에 앉아서 아이와 함께 연탄곡을 ..

[김진영, 낯선 기억들] 부드러운 악

오늘의 악은 더 이상 평범한 악이 아니다. 선과 악의 경계를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거나 도덕적 양심을 외면하는 그런 의지적인 악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암묵적으로 지배하는 악은 선악의 경계가 지워진 악, 양심 자체가 이익을 따라서 선과 악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부드러운 악이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누구나 알듯이 아렌트는 악을 두 종류로 구분했다. 하나는 종교가 상상했던 악이다. 중세가 사탄이라 명명했던 이 악은 특별한 악, 흉측한 악, 그로테스크한 악이었다. 그래서 뒤러는 그 악을 흉악한 용으로 그렸고 보스는 징그러운 곤충 떼들로 그렸다. 아렌트는 그러나 또 하나의 악, 현대의 악, 평범한 악을 발견했다. 현대의 악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도 평범해서 아렌트가 ..

[김진영, 낯선 기억들] 날씨에 대하여

날씨의 징후란 결국 자연과 역사 사이의 암호문이다. 날씨의 징후를 읽는 일은 다름 아닌 이 암호문을 해독하는 일이다. 아도르노는 이 암호문을 변증법적으로 번역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자연은 자연이 가장 역사적일 때 자연이며, 역사는 역사가 가장 자연적일 때 역사다.” 김진영 전 철학아카데미 대표 오늘의 날씨:“연휴의 마지막 날인 오늘 전국의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쾌청하겠습니다. 기온도 포근해서 나들이하시기에 좋겠습니다. 다만 맑은 날씨 속에 대기가 점점 더 메마르고 있어서 불이 날 가능성이 높은 만큼 불씨 관리 잘해주시기 바랍니다. 전국에 비 소식도 있습니다. 내일부터 주말까지 길게 비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날씨는 정보만이 아니다. 징후이기도 하다. 정보가 사실 내용을 말한다면, 징후는 ..

[김진영, 낯선 기억들] 머나먼 코리아

그녀가 두려워했던 ‘내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그 나라는 사랑 대신 배신을 선택하고, 약자 대신 강자를 추앙하고, 희생자 대신 영웅을 찬양하고, 평화 대신 전쟁의 위기를 정치화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을까. 나날이 많은 이들이 살 수 없어 떠나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전쟁과 폐허의 나라가 아니었을까. 김진영 전 철학아카데미 대표 얼마 전 노인분들께 인문학 강의를 하다가 영화 하나를 보게 되었다. 수년 전 소위 국뽕 영화로 구설에 올랐던 이다. 그때는 아예 포기했다가 이제 와 일 때문에 제대로 보니 말 그대로 뻔한 1970년대식 이데올로기가 씁쓸한 영화였다. 그런데도 한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건 조국을 지키고 싶다고, 싸울 수 있도록 무기를 달라고 맥아더 장군 앞에서 눈물로 외치는 어느 소년병의 ..

[김진영, 낯선 기억들] 찬란함을 기억하는 법

오늘 아침의 날씨와 같은 찬란함, 사랑의 찬란함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건 소유욕이 아니다. 그건 햇빛을 못 이겨 날개를 푸덕이는 새들처럼 자기도 모르게 그늘을 찾게 만드는 부끄러움이다. 사랑의 환희 앞에서, 찬란하고 투명한 빛의 충만함 앞에서 더는 숨길 수 없는 누추했던 삶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며칠 밤사이 폭우가 험하게 쏟아지더니 오늘은 거짓말처럼 날씨가 찬란하다. 아침 일을 마무리하고 늦은 산책을 나간다. 햇빛은 찬연하고, 대기는 투명하고, 아직 초록이 무르익지 않은 여린 나뭇잎들은 청결하고, 장난처럼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가볍고 부드럽다. 벌써 더워진 대기 때문인지 조금 걸었는데도 이마와 몸이 땀에 젖는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는다. 투명한 햇빛 속에서 점점 ..

[김진영, 낯선 기억들] <위대한 개츠비>의 위대함

개츠비는 알고 있었다. 그의 순수한 환이 타락의 세상에서 실현될 수 없다는 것, 데이지가 마침내 그를 배신하리라는 것, 자신이 결국 속물적인 동부 토착 귀족들의 더러운 음모에 걸려서 목숨마저 잃고 말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환과 희망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미국사와 미국소설을 공히 관통하는 모티브가 있다면 ‘사냥’이다. 소위 프론티어 정신을 앞세워 자행되었던 미국 번영사가 무자비한 신대륙 사냥기였듯 근대 미국소설의 원조로 꼽히는 멜빌의 또한 거대한 백고래에 대한 처절한 사냥기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적 사냥본능이 현실과 소설 안에서 정점에 달했던 건 미국의 1920년대였다. 재즈와 알 카포네의 암흑시대로 불리는 1920년대 미국은 ..

[김진영, 낯선 기억들] 대통령의 가난

두 명의 가난했던 전임 대통령이 있었다. 한 사람은 돈이 없어서 대학조차 포기했던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어린 시절 시장에서 가판대를 메고 다녔다는 사람이다. 그들이 지녔던 가난의 도덕은 영 달라 보인다. 니체의 분류를 빌리자면, 전자는 주인의 도덕주의자였고 후자는 노예의 도덕주의자였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가난하면 인색해지고 인색하면 수전노가 된다. 한때 세상은 수전노의 삶이 더는 필요 없는 세상을 유토피아라는 이름으로 꿈꾸었지만 그 꿈을 믿는 사람은 이제 없다. 온 세상에 자본이 넘치는데도 세상은 오히려 더 가혹한 가난과 궁핍의 디스토피아가 됐기 때문이다. 궁핍이 사라지지 않으면 수전노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세상이 달라지듯 수전노도 그 성격이 변할 뿐이다. 그래서 수전노의 삶에도 역사가 있고..

[김진영, 낯선 기억들] 예술을 추억하면서

강자만이 승리하는 삶의 메커니즘 안에서 그러한 약함의 부드러움은 용서받을 수 없는 약점일 뿐이다. 한줌의 권력을 손안에 쥐었을 때 그것이 즉각 약자들에 대한 가혹한 갑질의 폭력으로 돌변하는 건 그것이 내 안의 생래적 약함을 기억시키기 때문이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미투의 홍수가 세상의 가면을 벗기고 있다. 그동안 위선의 가면 아래서 약자의 성을 짓밟고 유린했던 음란폭력의 민낯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아직 뚜껑이 열리지 않은 제도권도 있지만 추세로 보아 그 속살 풍경을 들키는 일도 시간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특별히 주목되는 현상이 하나 있다. 그건 예술이라는 고상한 제도권이 알고 보니 가장 헐벗은 음란폭력의 난장이었다, 라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오래된 전설 하나를 기..

[김진영, 낯선 기억들] 롤랑 바르트의 하품

애도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치르게 되는 슬픔과 고통의 작업이다. 프로이트에게 그것은 생으로 복귀하기 위한 슬픔의 통과제의였지만 바르트에게 애도는 끝날 수 없는 것이었다. 바르트는 애도 대신 슬픔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는데 그즈음이 사진 속의 시기이기도 했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전국이 큰 추위에 덮여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두꺼운 패딩을 입고 등을 웅크리고 걷는다. 그런 세상의 풍경 탓일까. 세상 풍경이 어쩐지 쓸쓸하고 멀게 보인다. 그래서인지 창가에 선 마음도 때아니게 울적해지고 마음의 위안을 찾다가 뜻 없이 서가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뒤적이기도 한다. 책장 앞에서 서성이며 손 가는 대로 책들을 뽑아 들추어 본다. 어떤 책은 꿈을 꾸게 만든다. 어떤 책은 몽롱했던 머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