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만이 승리하는 삶의 메커니즘 안에서 그러한 약함의 부드러움은 용서받을 수 없는 약점일 뿐이다. 한줌의 권력을 손안에 쥐었을 때 그것이 즉각 약자들에 대한 가혹한 갑질의 폭력으로 돌변하는 건 그것이 내 안의 생래적 약함을 기억시키기 때문이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미투의 홍수가 세상의 가면을 벗기고 있다. 그동안 위선의 가면 아래서 약자의 성을 짓밟고 유린했던 음란폭력의 민낯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아직 뚜껑이 열리지 않은 제도권도 있지만 추세로 보아 그 속살 풍경을 들키는 일도 시간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특별히 주목되는 현상이 하나 있다. 그건 예술이라는 고상한 제도권이 알고 보니 가장 헐벗은 음란폭력의 난장이었다, 라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오래된 전설 하나를 기억해 보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세이렌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반은 새이고 반은 여자의 형상을 지니는 조류인간 세이렌 자매는 인간의 두 원초적 감정인 매혹과 공포를 다 같이 상징하는 존재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그녀들은 매혹적이지만, 그 노래에 취해 뱃길을 벗어난 항해자들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치명적 공포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이렌의 신화 안에는 오늘 그 맨얼굴이 드러나는 아름다움과 폭력의 내밀한 관계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
세이렌의 텍스트는 두 가지 관점으로 읽을 수 있다. 우선 자연의 노예였던 인간이 어떻게 자연 위에 군림하는 강자가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오디세우스가 누구도 극복하지 못했던 세이렌의 유혹에게 승리하는 건 그가 이미 이성적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성의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로 몸과 영혼이 온전히 하나였던 자기를 강자인 이성과 약자인 육체로 이분화한다. 그리고 그 이성의 단단한 밧줄로 자연의 노래를 따라가려는 육체를 마스트에 결박하는 책략을 통해서 세이렌의 유혹을 무력화시킨다. 오디세우스가 마침내 자연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가 되는 건 스스로를 불구의 존재로 만드는 강자의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면화된 강자의 메커니즘은 이후 사회적 규범과 원칙이 되어 문명의 세상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끝판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생존 메커니즘의 세상, 오로지 강자만이 살아남도록 고착화된 현대 사회의 현실이 있다.
그러나 세이렌의 이야기를 또 하나의 관점으로, 즉 예술의 운명사로 읽는 일도 가능하다. 그럴 때 세이렌의 신화 텍스트는 예술의 탄생과 몰락의 행로를 보여준다. 세이렌 자매의 합창이 절창인 건 그것이 이성과 자연의 관계를 폭력적 권력이 아니라 비폭력적 화해로 노래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요정들의 비폭력적 노래는 예술의 원형성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하지만 그들의 비극적 신화는 그 비폭력의 절창이 오디세우스의 이성적 책략과 폭력에 의해서 몰락하는 운명을 함께 보여준다. 몰락한 예술은 이후 권력의 시녀가 되어 강자의 폭력을 미화하고 합리화하는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다. 문화예술계의 음란폭력 또한 대리만족과 오락의 수단으로 전락한 사이비 예술의 누추한 맨얼굴이다. 세이렌과 함께 비폭력적 절창이 사망한 뒤에도 예술사는 길고 화려하게 이어지지만 그 모두가 사실은 예술의 몰락사일 뿐이다.
강자만이 인정받는 세상에서 약자는 즉각적인 혐오와 폭력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 충동이 겨냥하는 정작의 타깃은 타자의 약함이 아니라 내 안의 생래적 약자성이다. 통제할 수 없도록 부드러운 약자성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사랑하는 사람은 안다. 저 대책 없는 약자성, 사랑하는 것들과 비폭력적으로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내 안의 놀라운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강자만이 승리하는 삶의 메커니즘 안에서 그러한 약함의 부드러움은 용서받을 수 없는 약점일 뿐이다. 한줌의 권력을 손안에 쥐었을 때 그것이 즉각 약자들에 대한 가혹한 갑질의 폭력으로 돌변하는 건 그것이 내 안의 생래적 약함을 기억시키기 때문이다. 강자들이 행사하는 갑질의 폭력은 모두가 자기에게 향하는 자해의 폭력이다.
예술은 생래적인 비폭력성의 표현이다. 그 표현의 형식들을 우리는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의 예술들은 비폭력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한 장의 달러보다 가벼워진 세상’(에밀리 브론테)의 권력과 폭력에게 기꺼이 순종하고 복종한다. 그 구걸의 대가로 누군가들은 한줌의 지위와 몇 푼의 금전, 음란한 향유의 티켓 몇 장을 얻어 갖기도 한다. 하지만 문득 신화의 먼 바다를 추억하면 지금도 오디세우스가 마스트에 묶여 있는지 모른다. 세상의 그늘진 곳곳에서 강자에게 폭력을 당하는 약자들처럼 입이 막힌 채 신음하는지 모른다. 이 침묵의 신음들에게 귀 기울일 때다. 그것이 비천해진 오늘의 예술들이 귀 막아 버린 세이렌의 절창이기 때문이다.
'김진영의 낯선 기억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진영, 낯선 기억들] <위대한 개츠비>의 위대함 (0) | 2022.02.25 |
---|---|
[김진영, 낯선 기억들] 대통령의 가난 (0) | 2022.02.25 |
[김진영, 낯선 기억들] 롤랑 바르트의 하품 (0) | 2022.02.25 |
[김진영, 낯선 기억들] 꿈들의 사전 (0) | 2022.02.25 |
[김진영, 낯선 기억들] 가을 하늘은 왜 텅 비었나 (0) | 2022.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