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낯선 기억들

[김진영, 낯선 기억들] 롤랑 바르트의 하품

모든 2 2022. 2. 25. 07:15

애도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치르게 되는 슬픔과 고통의 작업이다. 프로이트에게 그것은 생으로 복귀하기 위한 슬픔의 통과제의였지만 바르트에게 애도는 끝날 수 없는 것이었다. 바르트는 애도 대신 슬픔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는데 그즈음이 사진 속의 시기이기도 했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전국이 큰 추위에 덮여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두꺼운 패딩을 입고 등을 웅크리고 걷는다. 그런 세상의 풍경 탓일까. 세상 풍경이 어쩐지 쓸쓸하고 멀게 보인다. 그래서인지 창가에 선 마음도 때아니게 울적해지고 마음의 위안을 찾다가 뜻 없이 서가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뒤적이기도 한다.

 

책장 앞에서 서성이며 손 가는 대로 책들을 뽑아 들추어 본다. 어떤 책은 꿈을 꾸게 만든다. 어떤 책은 몽롱했던 머리 안에 다시 얼음물이 찰랑거리게 한다. 어떤 책은 말들의 허무를 새삼 맛보게 하고 어떤 책들은 삶의 운명성을 새삼 기억시킨다. 그런데 어떤 책은 하품에도 진실이 있다는 걸 돌연 깨우치기도 한다. 무심코 들추어 본 롤랑 바르트의 책이 그렇다.

 

내가 가진 바르트의 책들 중 하나에는 그의 사진들이 꽤 많이 들어 있다. 일찍이 시인 김수영은 우리나라 시인들은 도대체 자기 사진 한 장을 제대로 찍을 줄 모른다고 힐난했지만 이런저런 책들에서 만나는 저자들의 사진들이 마음에 드는 일은 사실 드물다. 바르트의 여러 사진들이 그런 점에서 빼어난 건 아니지만 그중에서 한 장의 사진은 정말 내 마음에 든다. 사진 속에서 지금 그는 아마도 무슨 세미나 토론을 하면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당대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마주 앉아 있다. 다른 이들은 

모두가 매우 진지한 표정인데 유독 바르트 자신의 얼굴만은 영 재미가 없다는 표정이다. 하품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장이라도 

하품이 나서 못 참겠다는 얼굴이다. 그 대단한 지성들의 자리에서 왜 그는 그렇게 재미가 없고 심심했던 걸까. 무엇이 그토록 하품이 나도록 그를 지루하게 했을까.

 

많이 알려져 있듯 그는 1980년 봄 어느 날 엘리제궁 앞 도로에서 작은 트럭에 치여 사망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때 그는 미테랑 대통령이 당대 지식인들을 초청해서 마련했던 오찬을 마치고 나와서 길을 건너던 중이었다. 나의 짐작이지만 아마도 그는 그 대단한 오찬 자리에서도 내내 하품을 참았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즈음은 바르트가 어머니를 잃고 이년이 지난 뒤였고 아직도 애도의 슬픔정리하지 못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대한 바르트의 애착은 유명하다. 유년기에 아버지를 잃은 그는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게다가 그는 동성애자였으므로 어머니는 그가 사랑했던 단 한 명의 여인이었다. 여기서 그의 사랑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해석이 필요하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대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의 생은 어머니의 존재 여부를 따라서 두 시기로 확연하게 나누인다. 어머니가 살아 있었을 때, 바르트의 지적 주제는 생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뒤 그의 주제는 슬픔, 더 정확히 애도의 슬픔으로 바뀐다. 그런데 그에게 애도란 무엇이었을까.

 

애도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치르게 되는 슬픔과 고통의 작업이다. 프로이트에게 그것은 생으로 복귀하기 위한 슬픔의 통과제의였지만 바르트에게 애도는 끝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랑의 대상은 말했듯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이며 그 사랑이 끊어진 자리 또한 무엇으로도 대신 채워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애도 대신 슬픔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는데 그즈음이 사진 속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그의 하품이 얼마든지 이해되기도 한다. 그때 그는 오로지 하나의 생각, 잃어버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만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거대하고 드높은 지성의 담론들이 무슨 의미가 되고 즐거움이 되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담론은 모두가 헛된 말들의 유희뿐인지 모른다. 그 어떤 담론도 사랑의 상실과 그 아픔을 대신하지 못한다, 라고 그 자신도 <애도 일기>에 썼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일이 생각난다. 세월호 이슈가 뜨거웠던 몇 해 전 어느 날 토요일 오전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광화문에 갔었다. 일군의 부모님들이 천막 아래서 단식을 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다가가 위로를 하고 어떤 정치인은 울기도 해서 그 안타까운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단식으로 지친 부모님들의 굳은 얼굴은 그저 무관심하고 지루해서 하품이라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때 그곳의 담론들과 사교적 행위들이 그분들에게 무슨 위안이 되었을까. 그분들의 머리와 가슴속에는 오직 하나의 얼굴, 돌아오지 못하는 아이들의 얼굴만이 가득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