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저마다의 꿈이 있고 그 꿈들은 서로 얼굴이 다를 것이니 캘린더 위에 그려지는 꿈들의 그림도 참으로 다양하리라. 사실 꿈이란 애초에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무수한 꿈들을 분류해서 하나의 사전을 만들어본다면 어떤 꿈들의 사전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새해가 왔다. 새해가 오면 누구나 꿈을 꾼다. 도래할 시간의 숫자들만이 가득한 캘린더가 스케치북인 듯 그 위에 새로운 한해의 꿈들을 그려넣는다. 누구나 저마다의 꿈이 있고 그 꿈들은 서로 얼굴이 다를 것이니 캘린더 위에 그려지는 꿈들의 그림도 참으로 다양하리라. 사실 꿈이란 애초에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무수한 꿈들을 분류해서 하나의 사전을 만들어본다면 어떤 꿈들의 사전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우선 밤에 꾸는 꿈과 낮에 꾸는 꿈이 있다. 하기야 꿈은 잠 속의 세상이니까 낮의 꿈이라는 생각 자체가 어불성설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꿈이 반드시 잠 속에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사실 우리는 낮에 깨어서 더 많은 꿈들을 꾸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그걸 근거 없는 백일몽이라고 부르지만 백일몽이 반드시 덧없고 비정상적 현상인 건 아니다. 거리를 걸으면서, 차 안에서, 카페에서, 심지어 비즈니스 담화에 열중하는 사이에도 우리는 쉼 없이 눈앞의 목적과 상관없이 혼자서 흘러가는 무목적적 생각들, 몽상들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는가. 목전의 목적을 벗어나 어디론가 흘러가는 그 몽상과 꿈들 또한 그저 망상과 공상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오히려 더 많은 생의 진실들이 그 꿈들 안에 간직되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또 개인의 꿈과 집단의 꿈이 있다. 꿈은 일반적으로 개인이 내밀하게 자기 안에 품은 소망으로 정의되지만 그 꿈들이 과연 사적이고 개인적이기만 한 걸까. 누군가는 세상 사람들의 꿈들을 다 모아서 한 권의 책을 만들면 우리가 다 같이 무의식적으로 꿈꾸는 다른 세상의 지도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고 말한 바 있었다. 하기야 장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세상이 사실은 테크놀로지와 그 관제기술들이 구축한 ‘상상된 현실의 세상’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장자의 유명한 ‘호접몽’ 에피소드 또한 꿈과 현실에 대한 선입견을 뒤집는 과감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함의야 어떻든 이들이 다 같이 말하는 건 홀로 꾸는 꿈들은 사적인 것만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적 소망의 표현이며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을 꾸면서 또 그 무언가를 함께 꿈꾼다는 사실이다. 이 꿈은 무엇이며 알 수 없는 두 꿈의 미로 사이에는 어떤 아리아드네의 실이 이어져 있는 걸까. 이 끈을 찾는 일은 이기적으로 파편화된 오늘의 세상에서도 그 어떤 집단의 꿈, 보편성의 이념을 구상해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또 자연의 꿈과 도시의 꿈을 구분해볼 수 있다. 일반적인 공간 상상력은 도시는 삭막하고 자연 안에는 꿈이 있다고 이분화한다. 그래서 도시 안에 갇혀 지내는 이들은 누구나 자연에 대한 동경이 있고 그 동경은 아마도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꿈이 반드시 현실의 외부로 상징되는 자연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꿈은 오히려 우리가 갇혀서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공간인 대도시 곳곳에 포진해 있기도 하다. 자연의 꿈이 소극적 도피라면 도시 안에서의 꿈은 적극적인 현실의 변화를 꾀하는 꿈이다. 그런 점에서 도시에서의 꿈은 일종의 ‘정치적 무의식’의 발현일 수도 있다.
끝으로 과거로 향하는 꿈과 미래로 향하는 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꿈의 본질은 언제나 불행했던 과거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기획이 가능한 미래의 시간으로 향하는 소망이다. 하지만 과거로 역류하는 꿈, 지나간 시간들을 또 한 번 되새김질하는 기억이라는 꿈도 있다. 과거의 시간들에 대한 냉엄한 질문과 성찰 없이 내일의 새로운 꿈이 기획되고 실현될 수 있을까. 과거의 꿈들이 역사 속에서 왜 매번 배반당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지, 우리가 품었던 미래에 대한 간절한 꿈들이 왜 더 나쁜 환멸만을 가져다주었는지 기억하고 묻지 않은 채 그려지는 미래의 꿈은 또 한 번 반복되는 불행한 과거가 될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꾸면서 산다. 그러나 그 꿈이 점점 더 사적이고 이기적인 꿈으로 왜곡되고 왜소해지는 것이 오늘 우리 시대 꿈의 현실일 것이다. 그건 꿈속에 잠재하는 놀라운 변화의 폭발력 대신 꿈의 병적인 퇴행만을 불러올 뿐이다. 시대를 가름하는 전환점들은 여러 번 있었지만 우리는 사실 역사 안에서 꿈의 진정한 힘을 구체적인 현실로 실현해보지 못했다(촛불도 이 점에서는 한계가 있다). 아마도 그 꿈의 가능성은 개인의 꿈과 집단적 꿈, 나의 꿈과 공동체의 꿈이 서로를 발견하는 그 어떤 연결선 위에 있을 것이다. 그 연결선의 영역, 거기가 진정한 꿈의 고향이고 꿈들도 모두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으리라.
'김진영의 낯선 기억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진영, 낯선 기억들] 예술을 추억하면서 (0) | 2022.02.25 |
---|---|
[김진영, 낯선 기억들] 롤랑 바르트의 하품 (0) | 2022.02.25 |
[김진영, 낯선 기억들] 가을 하늘은 왜 텅 비었나 (0) | 2022.02.25 |
[김진영, 낯선 기억들] 댈러웨이 부인의 꽃 (0) | 2022.02.25 |
[김진영, 낯선 기억들] 조동진의 비타협적 가슴 (0) | 2022.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