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낯선 기억들

[김진영, 낯선 기억들] 조동진의 비타협적 가슴

모든 2 2022. 2. 25. 06:56

조동진의 가슴은 단호하고 비타협적이다. 실용주의를 익히지 못한 아이처럼 그의 가슴은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그 무엇으로도 대체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쉬움을 외면하고 대신 사랑의 어려움을 고백한다. 사랑의 가슴은 먼 길을 가야 하고, 우회해야 하고, 야윈 얼굴이 되어야 한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들 가운데 하나는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글을 쓰는 일이라고 롤랑 바르트는 슈만에 대한 음악 에세이에서 고백한 바 있다. 어쩌면 나 또한 그런 어려움 앞에 서 있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나는 내가 오래 사랑했던 한 가수와 노래에 대해서 사랑을 고백하려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나간 조동진과 그의 <나뭇잎 사이로>가 그 고백의 대상이다.

 

세대가 좀 뒤지기는 해도 나는 그와 동시대인이다. 그건 그와 내가 여러 역사적 경험들과 더불어 같은 청춘의 시절을 건너왔다는 걸 의미한다. 당시의 젊음들은 매스컴들이 ‘청년문화’라 부추겼던 대중문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새로움에의 열정인 젊음의 문화사회적 표출이라기보다는 유럽의 68학생운동이 미국식으로 시장화되어 직수입된 문화산업의 첫 성공사례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청춘들을 소비주체로 삼기 시작한 문화산업의 시장영역들은 청춘영화를 위시해서 다양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폭발적인 호황을 누렸던 건 포크와 발라드, 그룹사운드 등등이 혼재했던 대중가요였다.

 

사운드 트랙이 아니라 통기타의 고전성을 좋아했던 내가 더 많이 끌려들었던 건 당연히 포크와 발라드 음악 영역이었다. 많은 가수와 노래를 다 좋아하면서도 내 취향이 특별히 애착했던 건 성격과 분위기가 영 다른 두 부류의 음악이었다. 당시 가장 많이 사랑받았던 송창식 윤형주의 듀엣과 김세환의 청춘가요들을 나 역시 아주 많이 좋아했다. 그러나 그런 즐겁고 달콤한 젊음들 뒤편에서 들려오던 언더그라운드의 목소리, 낮고 느리고 아픔이 담겨서 쓰디쓴 김민기의 목소리를 나는 또 내 것처럼 가슴에 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이지만 모든 걸 다 사랑하고픈 열정이 젊음의 가슴이라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어 보인다.

 

조동진과의 만남은 한 템포 늦게 왔다. 그건 여러 까닭이 있었겠지만 더 일찍 알게 되었어도 나는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후에도 그의 노래들에 애착한 적이 없다. 그의 노래들은 지나치게 느리고 낮고 무기력해서 끝까지 공감하면서 듣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나뭇잎 사이로>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지금도 어느 초가을 저녁 대학 도서관을 나와 긴 교정을 걸어 내려갈 때 어딘가에서 들려오던 조동진의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그건 그 순간에도 덧없이 사라져가던 내 청춘의 목소리였다.

 

그 당시 <나뭇잎 사이로>에 대한 나의 매혹과 애착은 쉽게 감염되는 젊은 감수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사이 살아오면서 보다 사변적이 된 청각으로 다시 들으면 그 까닭은 보다 내밀하고 깊은 어느 장소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나는 그 장소를 지금은 아무도 말하지 않아서 고대어가 되어버린 ‘가슴’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호명하려 한다. 다른 노래들에서는 늘 전면에 머물던 조동진의 가슴이 어쩐 일인지 이 노래에서는 ‘나뭇잎 사이’로, ‘지붕들 사이’로 문득 열려서 쉽게 지나가는 계절과 다정하게 위안하는 대도시 저녁의 불빛 풍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윈 얼굴’의 가슴에게 너도 그렇게 쉽고 따뜻한 길을 따라서 살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조동진의 가슴은 의외로 단호하고 비타협적이다. 아직 실용주의를 익히지 못한 아이처럼 그의 가슴은 그가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그 무엇으로도 대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쉬움을 외면하고 대신 사랑의 어려움을 고백한다. 사랑의 가슴은 먼 길을 가야 하고, 우회해야 하고, 야윈 얼굴이 되어야 한다. 가끔 그 사이 안으로 작은 꿈의 별이 뜨기도 하지만, 그는 그 낭만의 허위 또한 알고 있는 듯 다시 사랑의 엄중한 현실인 저 피할 수 없는 ‘야윈 얼굴’로 귀환한다. 다름 아닌 이 비타협적 가슴이 더 많이 유행했던 당대의 젊은 노래들로부터 그를 뚜렷이 변별하며, 또 비슷한 이유로 한두 세대 뒤 역시 타협을 모르는 채 아파했던 기형도의 그것과 내밀한 친화성을 지닌다는 것이 나의 오랜 생각이다.

 

산다는 건 나도 모르게 가슴을 잃어가는 일인지 모른다. 물론 그건 가슴을 돌보지 않은 주인 탓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더 많이 그건 심지어 가슴을 버려야 매일의 삶을 벌 수 있는 시대와 세상의 구조 탓이다. 그런데 사람의 가슴이 버린다고 버려지는 걸까. 그건 나와는 무관하게 늘 혼자서 내 안에 남아 있는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알 것 같다. 왜 길고 신산스러운 세월을 건너온 지금에도 문득 <나뭇잎 사이로>의 멜로디가 바람 한줄기처럼 안으로 흘러들면 아이처럼 따라서 흥얼거리곤 하는지를.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