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낯선 기억들

[김진영, 낯선 기억들] 댈러웨이 부인의 꽃

모든 2 2022. 2. 25. 07:00

우리는 누구나 두 개의 인생을 산다. 하나는 나 있는 내 인생, 나의 현재적 삶이고, 다른 하나는 나 없는 내 인생,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될 사후의 삶이다. 다른 방식으로 나 없는 내 인생을 준비했던 이들도 있다. 비록 소설적 인물이기는 해도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 그렇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나 없는 내 인생>이라는 영화를 다시 보았다. 이제 겨우 스물셋인 젊은 여자가 주인공이다. 벌써 아이가 둘이고 능력 없는 남편 대신 대학의 청소부로 일하지만 나름 행복하게 살아가던 그녀에게 상상하지 않았던 불행이 찾아온다. 남겨진 시간이 두 달뿐인 말기 암 판정이 그것이다. 영화는 그녀가 이 시한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자기에게 남겨진 시간을 두 개의 인생을 위해서 나누어 쓴다. 우선 그동안 살아보지 못했던 자기만의 생을 위해서 쓴다. 우연히 시작된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전 같으면 포기했겠지만 이번에는 온몸으로 받아들여 주체적인 사랑으로 실현한다. 동시에 남은 시간을 가까운 타자들, 즉 자신이 없어져도 여전히 세상에 남게 될 가족들을 위해서 사용한다. 우울한 유서를 쓰는 대신에 그동안의 기쁜 추억들과 사랑과 부탁의 목소리를 담아서 두 아이와 남편 그리고 어머니에게 특별한 선물로 마련하는 세 개의 녹음테이프가 그것이다.

 

극적인 서사와 구성 때문에 특별해 보여도 사실 이 영화는 모두가 살아가는 평범한 인생의 모습을 보여준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누구나 두 개의 인생을 산다. 하나는 나 있는 내 인생, 나의 현재적 삶이고, 다른 하나는 나 없는 내 인생,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될 사후의 삶이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중심적 삶을 살면서도 가족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떠난 후 남겨질 가족의 삶을 준비하고, 명망이 중요한 사람은 사후에 그 대신 살아가게 될 이름을 준비하고, 신앙인은 내세의 다른 세상을 위한 준비의 시간으로 현세의 삶을 경건하게 살아가고자 애쓴다.

 

개개의 삶은 모두가 필연이고 귀해서 그 값을 비교해 따질 건 아니다. 하지만 좀 더 잘 사는 삶은 무엇일까 묻지 않으면서 매일을 사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그 답들이야 천차만별이겠지만 앞서 말한 두 개의 삶이 저마다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지는가의 차이를 통해서도 하나의 답을 얻어 볼 수도 있겠다. 만일 두 개의 인생이 오로지 나와 내 집단의 이해관계망 안에서만 살아질 때 그 생은 다만 이기적인 삶의 한계와 구속성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더 많은 것들을 축적해서 제 가족에게 남기고자 하는 상속의 욕망, 금욕 대신 금력과 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종교계의 몰골들, 인간과 세상의 미적 가치와 권리를 지키겠다는 예술과 문화영역에서 목격되는 이권투쟁의 추한 모습도 그런 하류의 삶을 보여준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건 그러한 이기적 삶이 이제는 저질적 특권 집단만이 아니라 모든 이의 평범한 삶으로 고착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보편적 인생론일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방식으로 나 없는 내 인생을 준비했던 이들도 있다. 비록 소설적 인물이기는 해도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 그렇다. 여러 독법이 있겠지만 이 소설 또한 나 없는 내 인생을 준비하는 한 우아한 여자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댈러웨이 부인은 파티의 꽃은 자기가 직접 사겠다고 말했다”라는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 안에는 소설의 주제가 함축되어 있지만 이 우아한 19세기 여인의 특별함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하나의 질문도 들어 있다. 그건 그녀가 스스로 사겠다고 선언하는 그 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 답은 조금만 더 읽으면 마주치게 되는 그녀의 짧은 독백 안에서 들을 수 있다. 맑은 날 아침 런던의 대기를 마시며 걷다가 그녀는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죽으면 런던의 대기가 되고 싶어. 사람들이 숨 쉬며 그 대기를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게 하고 싶어. 그래서 나는 파티를 준비하는 거야. 나 스스로 이렇게 꽃을 사러 가는 거야.” 댈러웨이 부인의 꽃은 분명 그녀의 두 인생을 위한 꽃이다. 그것은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세계대전의 상처로 얼룩진 당대의 암울한 런던을 위한 꽃이다. 댈러웨이 부인이 그토록 아름답고 우아한 건 그녀가 이 두 인생의 꽃을 다 알고 있고 그 두 꽃을 모두 ‘스스로’ 사려고 하는 특별한 욕망의 여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돌아보면 댈러웨이 부인처럼 우아한 두 인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도 숨은 꽃들처럼 존재한다. 아이들을 찾아서 바다로 투신했던 세월호의 잠수사와 투병 중에도 마지막까지 카메라를 놓지 않고 주변부 삶의 모습들을 기록하고자 했던 어느 다큐 영화인도 그런 숨은 꽃들이다. 불화와 모순으로 팽배한 세상이 오늘도 무사한 건 이처럼 소리 없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나 없는 내 인생들의 공력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