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67

그해 봄 / 도종환

그해 봄 / 도종환 그해 봄은 더디게 왔다 나는 지쳐 쓰러져 있었고 병든 몸을 끌고 내다보는 창밖으로 개나리꽃이 느릿느릿 피었다. 생각해보면 꽃 피는 걸 바라보며 십 년 이십 년 그렇게 흐른 세월만 같다 봄비가 내리다 그치고 춘분이 지나고 들불에 그을린 논둑 위로 건조한 바람이 며칠씩 머물다 가고 삼월이 가고 사월이 와도 봄은 쉬이 오지 않았다 돌아갈 길은 점점 아득하고 꽃 피는 걸 기다리며 나는 지쳐 있었다. 나이 사십의 그해 봄 - 시집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2006 문학동네’ 중에서 - 지금은 더디게 오지 않는 봄이 오히려 미덥지 않다. 줄곧 들어온 온난화에 대한 경각심 탓일 게다. 지난주 비 내린 후 꽃샘추위 어쩌고 하더니 요 며칠 낮의 온도가 후끈한 사이 집에서 내려다 뵈는 강둑에 개나리..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아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곳에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해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곳에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을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

지도/ 송종규

지도/ 송종규 나무껍질이나 갑각류의 등 같은 먼 친척 할머니의 몸을 씻겨 본 적 있다 내가 아직 걸어 본 적 없는 수만 갈래의 길들,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낡고 척박한 비포장도로가 온몸에 새겨져 있었다 균열 투성이 인간의 몸은 짐승의 뿔이나 향기로운 冠에 새겨진 세월의 무늬를 읽을 때처럼 당당하거나 삼엄하지 못했다 비눗물이 수만 갈래의 길속으로 스며들거나 흘러내릴 때 손바닥 가득 만져지던 비애 캄캄한, 한때 차갑거나 뜨거웠던 몸 생선 비늘처럼 벗겨낼 수 없는, 헐거워진 껍데기 가득 새겨 넣은 낡은 생의 기록들 그 여름 내내 방안 가득 비누 거품들이 떠다녔다 - 현대시학 2007년 11월호 - ‘나무껍질이나 갑각류의 등’이라니 끔찍하다. 끔찍한 비애다. 어떤 연유로 먼 친척 할머니의 등을 밀게 되었는지 ..

퀵 서비스/ 장경린

퀵 서비스/ 장경린 봄이 오면 제비들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씀바귀가 자라면 입맛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비 내리는 밤이면 빗소리에 발정 난 고양이 울음소리 덤으로 얹어 드리겠습니다 아기들은 산모의 자궁까지 직접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자신이 타인처럼 느껴진다면 언제든지 상품권으로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꽁치를 구우면 꽁치 타는 냄새를 노을이 물들면 망둥어 뛰는 소리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정경유착이 용이하도록 국회와 증권회사는 여의도에 몰아 놓겠습니다 돌아가신 이들의 혼백은 가나다순으로 잘 정돈해 두겠습니다 가을이 오면 제비들을 데리러 오겠습니다 쌀쌀해지면 코감기를 빌려 드리겠습니다 -현대문학, 2001년 5월호- 퀵 서비스는 말 그대로 빠른 배달 서비스입니다. 일정액의 수수료만 지불하면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보낼 ..

달 (영화 37도2부)/ 박정대

달 (영화 37도2부)/ 박정대 조금은 어두운 대낮 전기 플러그를 꽂으면 달이 뜨네. 정지된 풍경들 속에서 색소폰 소리가 나네. 아, 난 어지러워 무너진 언덕 너머에는 출렁이는 네 어깨와도 같은 신열의 바다가 있네. 어디라도 가려하지 않는 바람과 배 한 척 있네. 베티, 내 푸른 현기증과 공터의 육체 위에 너의 보라색 입술을 칠해 줘. 베티 기억하고 있니. 내 어깨 위에 걸려 있던 너의 다리 그 아래로만 흐르던 물결, 물결 속의 달, 바람 불어, 경사진 사랑의 저 너머에서 함께 출렁거리던 깊고도 위험했던 나날들 기억해? 그때 네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던 37도 2부의 숨결들. 나날들. 전기 플러그를 빼면 달이 지네. 조금은 어두운 대낮, 막판의 희망이 게으른 새들처럼 엎드려서 울고 있는 - 시집 '내..

친구 / 강승남

친구 / 강승남 오래간만에 대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니 모두 다 대학생이 된다 삼십 년 전 그날로 돌아가 대학생처럼 낄낄거린다 얼마 전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서는 모두가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나이 든 게 아니다 대학교,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잠시 헤어져 있었을 뿐 중학교 때나 국민학교 때 친구들과 만나면 나는 금세 코흘리개 어린애가 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더 먼 옛날로 돌아가 나 태어나기 전의 친구들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다시 어린 나무가 될 것이다 나뭇잎에 앉아 놀던 순한 바람이 될 것이다 아무런 걱정이 없던 그 오랜 날들의 친구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 다음 카페 ‘詩하늘’ 자작시코너에서 - 오래 사귀어 도타운 정을 나누는 아름다운 벗을 만날 수 있는 최대의 근거지는 역시 ..

봄맞이꽃/ 김윤현

봄맞이꽃/ 김윤현 추운 겨울이 있어 꽃은 더 아름답게 피고 줄기가 솔잎처럼 가늘어도 꽃을 피울 수 있다며 작은 꽃을 나지막하게라도 피우면 세상은 또 별처럼 반짝거릴 것이라며 많다고 가치 있는 것이 아니며 높다고 귀한 것은 더욱 아닐 것이라며 나로 인하여 누군가 한 사람이 봄을 화사하게 맞이할 수 있다면 어디에서고 사는 보람이 아니겠느냐고 귀여운 꽃으로 말하는 봄맞이꽃 고독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며 풍부한 삶을 바라기보다 풍요를 누리는 봄맞이꽃처럼 살고 싶다 - 시집 중에서 - 들꽃은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산과 들에서 자연 상태로 자라는 꽃을 일컫는다. 봄맞이꽃도 봄이면 어디에서건 볼 수 있는 들꽃이다. 봄부터 시작해서 한겨울까지 우리나라에서 피고 지는 들꽃만도 4천여 종이나 된다고 한다. 들꽃은 일..

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

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 시집 중에서 - 뱁새가 깊은 숲속을 자유로이 휘젓고 다녀도 쉴 곳은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셔도 그 배만 채우면 그만이라..

휴전선(休戰線) / 박봉우

휴전선(休戰線) / 박봉우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 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 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

달 / 원태경

달 / 원태경 칸트는 죽지 않았다 여러 모양의 달로 변했을 뿐이다 그는 날마다 정해진 시각에 약속한 옷을 입고 정해둔 길로 산책을 나선다 정해진 매일 밤 그는 내 몸을 열고 몸속으로 들어온다 그가 가만가만 펼쳐 보이는 내 잠은 푸르다 너무 푸르러서 어떨 땐 눈물이 난다 나는 날마다 다른 모습으로 찾아와 내 꿈과 동침하는 그를 맞아 기꺼이 몸을 섞는다 아프게 비운 자리 기쁘게 회임한다 열여덟 달 후 나는 그를 꼭 닮은 시간의 아이들을 낳을 것이다 아이들은 다시 스물여덟 명의 칸트로 자라 날마다 정해진 시간, 서약의 옷을 입고, 스스로 결정한 길을 향해 금빛 날개 번뜩이며 날아갈 것이다 자궁을 가진 자의 몸을 드나드는 존재들은 죽지 않는다 다만 변할 뿐이다 느릅나무 가지에 걸린 그의 눈, -시하늘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