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 시집 <밤에 쓰는 편지/1987,청사> 중에서 -
뱁새가 깊은 숲속을 자유로이 휘젓고 다녀도 쉴 곳은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셔도 그 배만 채우면 그만이라고 장자는 말했다. 안분과 자족을 뜻하는 말이겠는데, 시를 읽으면서 오히려 사람에겐 결코 만만한 노릇이 아니어서 뱁새만큼도 여의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세상천지 솟은 게 아파트고 늘린 게 집이라지만 몸 하나 눕힐 방 한 칸의 시름이 어디 시의 배경인 80년대만의 사정이겠는가.
하긴 비슷한 시기 먼저 발표된 박영한의 소설 ‘지상의 방 한 칸’은 부평초처럼 떠도는 도시 변방 뿌리 없는 군상들의 고단한 삶이 유난히 애절하게 그려져 있지만 작가 자신의 내면을 오롯이 응시하며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작업공간에 대한 소망도 함께 투영되어 있다. 이 시 역시 가장된 자로서 삶의 힘겨움뿐 아니라 시인으로서 자조적 연민도 함께 엿보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환희의 날이 더러 있겠으나 전월세로 떠돌다가 집칸을 장만하여 첫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도 빼놓을 수 없으리라.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 날들을 겪지 않은 사람은 그 설움을 잘 모른다.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근으로 아프고’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 쓰라림 뒤에 집장만의 감격을 알지 못한다.
아직도 일용할 양식이 걱정거리인 세상에서 자기 집을 갖는다는 의미는 크다. 방 한 칸에 전전긍긍했던 삶을 살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내 것의 온전한 방 한 칸은 곤한 육신을 눕힐 작은 공간인 동시에 정글자본주의 세상에서 거의 유일한 자구책이며 대항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유개념이 아니고 주거개념으로서의 주택이란 점잖은 말도 있지만 그것도 집이 투기대상에서 완전히 배제된 다음이라야 말이 되어도 되는 말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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