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휴전선(休戰線) / 박봉우

모든 2 2018. 6. 17. 17:01

 

휴전선(休戰線) / 박봉우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 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 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해방공간의 혼란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맥이 끊겼던 신춘문예가 부활한 1956년, 그 해의 조선일보 당선작이 박봉우의 '휴전선'이다. 이 시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염원이란 주제의식이 선명히 담긴 작품으로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크게 대수로울 것 없는 담론이겠으나 전쟁을 치른 직후인 50년대 중반의 지독한 반공 이데올로기에 매달렸던 통일관이 지배한 시기란 점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진보적 이념성향이 깔린 작품이라 하겠다.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한 남북의 자세 변화를 촉구한 선지자적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같은 시대적 상황 가운데 시가 탄생되었다는 사실 자체의 의의도 간과할 수 없으며, 그래서 시대적 억압을 극복한 시인의 용기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미래를 조망하고 갈망한 시인의 자유롭고 활달한 상상력이 더욱 돋보이는 절창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의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는 그의 삶 전반에서, 그리고 아들 이름을 '겨레'라 하고 두 딸은 '하나'와 '나라'로 지은 걸로 봐서도 미루어 짐작된다. 하지만 미사일 발사설과 함께 남북관계가 다시 긴장으로 이행하는 가운데도 요즘엔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라며 통일의 당위성을 역설한다든지,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이냐며 하루 빨리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싶은 민족의 큰 소망을 저음으로라도 이야기하는 시인을 잘 보지 못하겠다.

 

 시인뿐 아니라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라고 소리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현실에서 민족문학의 밑거름이 되고 '분단 극복 문학'의 가능성을 선도적으로 열어준 '휴전선'을 다시 읽는 의미는 크게 다가온다. 이데올로기 대립 상황에서도 한쪽에 편향되지 않고, 분단 문제를 고도의 시적 감각으로 형상화한 시인의 '휴전선'은 오히려 이 시점에서 더욱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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