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영화 37도2부)/ 박정대
조금은 어두운 대낮 전기 플러그를 꽂으면 달이 뜨네. 정지된 풍경들 속에서 색소폰 소리가 나네. 아, 난 어지러워 무너진 언덕 너머에는 출렁이는 네 어깨와도 같은 신열의 바다가 있네. 어디라도 가려하지 않는 바람과 배 한 척 있네. 베티, 내 푸른 현기증과 공터의 육체 위에 너의 보라색 입술을 칠해 줘. 베티 기억하고 있니. 내 어깨 위에 걸려 있던 너의 다리 그 아래로만 흐르던 물결, 물결 속의 달, 바람 불어, 경사진 사랑의 저 너머에서 함께 출렁거리던 깊고도 위험했던 나날들 기억해? 그때 네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던 37도 2부의 숨결들. 나날들. 전기 플러그를 빼면 달이 지네. 조금은 어두운 대낮, 막판의 희망이 게으른 새들처럼 엎드려서 울고 있는
- 시집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민음사) ' 중에서 -
여성에겐 임신하기 딱 좋은 온도며 성적으로도 달뜬 상태. 그래서 여자가 사랑하기에 최적의 온도 '37도2부' 숨 막힐 듯 아찔한 베티의 격정적이고 뜨거운 사랑을 회상하며 시작되는 영화 '베티블루 37°2'를 반추한다. 연인 조르그가 써놓은 수백 장의 글을 콕콕 타이핑해 출판사에 보내고 작품성을 인정치 않는 출판사 사장을 찾아가 해코지를 한다. 베티는 견딜 수 없는 둘레의 모든 상황과 갈수록 심각해지는 조울증에 현실적응이 불가능해진다.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베티를 하염없이 사랑하는 조르그의 모습도 눈물겹다. 결국 그를 작가로 성공시키려는 베티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정신을 놓아 식물인간이 되고 마는데, 조르그는 베티의 고뇌하는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해 베게로 그녀를 질식사시킨다.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불꽃인 여자, 전부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고 집에 불을 지르다 결국 자신의 눈을 찔러 자폭하는 여자. 광기와 격정, 우울과 관능으로 뒤범벅인 베티는 정말이지 펄펄 날뛰는 생명력 그 자체였다. '여자는 누구나 한번쯤 이르고 싶다'는 37도 2부의 아련한 동경. 상상 임신임을 알고 눈물로 얼룩진 베티의 얼굴에 괴로워하며 자신을 학대하던 조르그의 흐느낌이 가슴을 적신다.
영화를 다 보고서야 정말 지독한 사랑임을 알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생각난다. "우린 서로를 위한 의미였어, 누구도 우릴 갈라놓진 못해" "내 마음속에는 두 개의 빛이 있다. 하나는 꿈이고 나머지 하나는 사랑이다" 그는 베티에게서 둘 다를 얻었다. 그에게 있어 베티는 진정으로 서로를 위한 의미였다. 그러나 베티는 그녀 '자신을 위한' 꿈이란 건 있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이루지도 못했다. 과연 그녀는 그녀 자신으로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걸까? 모든 것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베티.
‘전기 플러그를 빼면’서 조르그의 대사 하나와 오래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전혜린을 필두로 최근의 신산스러운 여배우의 자살까지 병렬로 떠올려 본다. "창밖을 봐, 바람이 불고 있어. 하루는 북쪽에서 하루는 서쪽에서. 인생이란 그런 거야...우린 그 속에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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