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지도/ 송종규

모든 2 2018. 6. 17. 17:10

 

지도/ 송종규

 

나무껍질이나 갑각류의 등 같은 먼 친척 할머니의 몸을 씻겨 본 적 있다 내가 아직 걸어 본 적 없는 수만 갈래의 길들,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낡고 척박한 비포장도로가 온몸에 새겨져 있었다 균열 투성이 인간의 몸은 짐승의 뿔이나 향기로운 冠에 새겨진 세월의 무늬를 읽을 때처럼 당당하거나 삼엄하지 못했다 비눗물이 수만 갈래의 길속으로 스며들거나 흘러내릴 때 손바닥 가득 만져지던 비애

 

캄캄한, 한때 차갑거나 뜨거웠던 몸

생선 비늘처럼 벗겨낼 수 없는,

헐거워진 껍데기 가득 새겨 넣은 낡은 생의 기록들

 

그 여름 내내

방안 가득 비누 거품들이 떠다녔다

 

- 현대시학 2007년 11월호 -

 

 

  ‘나무껍질이나 갑각류의 등’이라니 끔찍하다. 끔찍한 비애다. 어떤 연유로 먼 친척 할머니의 등을 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비눗물이 노인의 패인 주름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릴 때 스스로 냉정하고 객관화되기란 참 힘든 노릇이었겠다.

 

 주름 지도는 한 개인의 통사뿐 아니라 시대의 한 축을 날줄과 씨줄로, 낱낱이 육필로 기록해가는 비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월과 함께 풍화와 마모도 겪을 것이다. 더러는 샘으로 그 자리에 고이고, 또 흘러 흘러서 냇물이 되고, 냇물은 강물을 이루며, 강물은 또 넘쳐서 바다에도 이를 것이다. 그 물길이 도는 굽이마다 고을마다 깊이 쓸어안고 함께 울어 흐르는 목숨이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몸속엔 웃음소리도 있고 흐느낌도 있다. 몸 위에서 대하를 이루는 지도에는 ‘토지’가 있고 ‘혼불’도 있을 것이다. 한 집안의 딸에서 어머니와 며느리, 시어머니와 친정엄마, 그리고 할머니로 이어지는 여인의 계보가 주름 지도에 선명히 기표되었다. 아주 짧고 간헐적 순간들이었을 삶의 환희와 그보다는 훨씬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을 고단함과 한이 박힌 궤적이었을 것이다. 복이라면 대체로 박복이었을 텐데 금이 짝짝 가서 오래 빛날 도자기로 여무는 대신 곧 부서질 일만 남은 것이다.

 

 지도처럼 새겨진 노인의 등에서 시인이 읽을 수 있었던 것과 좌표는 무엇일까? 시인은 그 지도의 주인공이 먼 친척할머니라고는 했지만 친정어머니 모습의 다름 아니고 종국에는 자신의 모습임도 안다. 사실은 시인이 ‘아직 걸어 본 적 없는 수만 갈래의 길들’이 아니라 자박자박 걷고 있는 길이며, 지금 각인중인 길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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