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모든 2 2018. 6. 17. 17:13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아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곳에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해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곳에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을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시집 ‘게눈 속의 연꽃’ 중에서 - 

 

 

 이 시는 황지우 시인이 한 신문사 건물에서 우연히 만난 잡지사의 선배시인으로부터 “이봐, 황시인! 시 하나 줘. 하이틴이야. 쉽고 간단하게 하나 얼른 긁어줘!”하며 청탁을 받은 후, 그 자리에서 5분 만에  ‘쓰윽 긁어서’준 시라고 한다. 그리고서 본인도 잊어버리고 있다가 성우 출신 김세원 씨가 방송에서 낭송한 뒤로 제대로 뜬 시가 되었단다. 

 

 까닭 모르게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 울렁거리는 사람, 이미 사랑에 빠져든 사람, 사랑의 칼날에 베여 상처가 남은 사람. 사랑과 관련되었거나 될 예정이거나 무관한 사람까지도 한번은 시나 낭송으로 접해보았을 황지우 시인의 이 시가 단 5분 만에 그것도 하이틴용으로 지어진 것이라면 누가 믿을까?

 

 어느 시가 단 몇 분 만에 만들어졌든, 몇 년이 걸렸든 간에 중요한 것은 그 시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느낄 수 있느냐 일 것이다. 이 시에서처럼 기다림이 절실해지면 그 기다림은 일방적이거나 수동적이 아니라 너에게로 가는 능동적인 행위가 되는 '숨결 더운 사랑'이란 걸 얼마나 진하게 가슴으로 느끼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 느낌의 색깔은 각자의 몫이다.

 

 지금도 어느 간이역 프래트홈에는 창문에 기대어 작정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이 있고, 글로서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꿈을 해마다 꾸는 문학도도 있다. 실제로 어느해의 어느 신문사 시상식에선 당선자를 호명하자 다른 사람이 성큼성큼 시상대로 걸어가 단상 위에 선 해프닝도 있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랬을까.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퇴임사 뒤에 이 시를 직접 낭송한 바 있다. 당연히 이때의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을 너'는 '통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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