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67

시를 읽는다/박완서

시를 읽는다/박완서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산문집『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현대문학, 2010)- 신문에 연재될 당시 아침에 그것을 받아 읽을 때의 행복감이 생각나서 얼른 샀다는 을 두고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 두 권의 책은 살 때도 행복했지만, 다시 읽어도, 아무데나 읽어도 내 정신은 조금은 깊고 높아지는 것 같은 기쁨을 맛본다..

참스승/목필균

참스승/목필균 꽃 이름만 배우지 마라 꽃 그림자만 뒤쫓지 마라 꽃이 부르는 나비의 긴 입술 꽃의 갈래를 열어 천지(天地)를 분별하라 몸으로 보여주는 이 -시집『꽃의 결별』(오감도, 2003)- 30년 전 K항공사에 근무할 때 뉴욕으로 짧은 출장을 간 일이 있었다. 탑승 항공기가 JFK공항 착륙을 앞두고 20여 분이나 선회비행을 계속했다. 현지 기상상태는 쾌청이었고 기체의 결함도 없었다. 그런데 왜 기장은 돌발적인 그라운드 컨디션에 의해 착륙이 지연된다고 기내 방송을 했으며, 실제로 20분 이상 공중을 뱅글뱅글 돌았을까. 활주로 사정 때문이란 사실은 알았지만 그 자세한 내막은 나중 항공사 운항관리실에 도착해서야 풀렸다. 원인은 허드슨 강 하류에 서식하는 수백 마리의 큰 새떼들이 각자 입에다 큼지막한 조개를..

작은 배/조동진

작은 배/조동진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시집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 (청맥, 1991)- 시집에 수록된 노랫말이다. 시집에는 이 노랫말에 얽힌 사연을 함께 실었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낯익은 길을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지난 일들이 떠오르게 마련인데, 때로는 막연한 느낌으로, 때로는 마치 오래 된 벽화처럼 희미한 그림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특히 계절이 바뀔 때이거나, 갑자기 다른 분위기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가슴 뭉클하게 되살아..

쌀과 살/ 손일수

쌀과 살/ 손일수 나는 쌀이라 하는데 포항 사시는 할머니는 살이라고 해요 “할머니, 살이 아니고 쌀.” “그래, 살이 아니고 살.” 아무리 말해도 할머니는 쌀을 살이라 해요 쌀밥을 많이 먹어 밥심으로 농사짓는다는 할머니 할머니가 말하는 ‘살’은 쌀도 되고 살도 되고 힘도 되지요 - 동시집『힘센 엄마』(푸른사상, 2013) 지난해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 대상에 선정되어 지원금 1천만 원을 받아 최근 출간한 동시집이『힘센 엄마』이다. 문학적 성과에 대해 시상하는 일반 문학상과는 달리 문학적 잠재역량을 보고 등을 밀어주는 제도이므로 등단 10년 이내의 문인들에겐 선망의 제도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지원금 1천만 원은 어느 문학상의 상금 못지않은 수준이다. 단 종전과는 달리 최근 5년간의 활동 증거자료를 요구하..

계구우후의 논리/ 박종인

계구우후의 논리/ 박종인 뒤로 걷는다는 것은 과거를 거스르듯 더 많은 것을 품어 안는 것 흘러간 역사를 껴안는다는 것 하늘을 마주 보며 더 많은 세상을 본다는 것 한 발을 뒤로 옮길 때마다 어제가 끼어들고 풍경이 한 아름 시야에 들어오고 구름이 빠른 행보로 이동해 내 안에 들어오고 역사의 아픔이 나를 차지하고 과거의 하늘, 5.18을 더듬고 젊고 어린 날을 거슬러 결국 자궁 속으로 생의 이전으로 태초로 달아나는 것들을 안아보는 것 깎아지른 절벽처럼 막아서는 것 저만큼 가 있던 정신이 퍼뜩 돌아오는 것 어쩌면 뒤로 걷는 것은 후진이 아닌가 뒤로 걷는 것은 퇴보가 아닌가 뒤로 걷는 것은 퇴화가 아닌가 뒤로 걷는 것은 앞을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문득, 나와 마주치는 것들에게 뒤란 무엇일까?를 건네고 싶은 그런..

밭 한 뙈기/ 권정생

밭 한 뙈기/ 권정생 사람들은 참 아무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것은 없다. 하나님도 ‘내'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 시집 ................................................................................................................................................ (권순진의 시 맛있게 읽기) ..

전혜린의 시 [그리움]

그리움/ 전혜린 거리만이 그리움을 낳는 건 아니다. 아무리 네가 가까이 있어도 너는 충분히, 실컷 가깝지 않았었다. 더욱 더욱 가깝게, 거리만이 아니라 모든 게, 의식까지도 가깝게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움은, - 유작집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1976) .................................................................................................................... 거리가 멀다 해서 더 그립고 가깝다고 해서 덜 그리운 건 아니다. 오히려 지척의 손에 잡히는 곳에 존재하는 그리움이 더 간절한 절망적인 그리움일지 모르겠다. 전혜린은 누구를 이토록 그리워했을까. 또 무엇을 그토록 열망하다가 그리 서둘러 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