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천수호 종가/천수호 이번 설에도 팔에 물집이 생겼다 달구어진 프라이팬 모서리를 스친 자국이다 명절 때마다 화상 자국이 생기는 것은 내 안의 기포들이 올라오면서 말 못할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다 종가집 며느리의 고단한 기포들이 한꺼번에 끓어올라 물집을 밀어내는 거다 그 속내 드러내..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3
처음처럼/신영복 처음처럼/신영복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서화 에세이 『처음처럼』 (랜덤하우스, 2007)-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된 서울대 경제과 ..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2
사평역(沙平驛)에서/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2
너무 아픈 사랑/류근 너무 아픈 사랑/류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2
내 친구, 선미/박성우 내 친구, 선미/박성우 선미는 내 여자 친구다 피아노도 치고 싶고 시도 쓰고 싶다는 선미는 내 여자 친구다 머리 감고 거울을 보다가 잠자리에 들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선미, 잠에서 깨어 뭉텅뭉텅 빠진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주워 버리는 아침이 가장 서글프다는 선미, 선미는 내 여자 ..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2
슬픈 도시락1/이영춘 슬픈 도시락1/이영춘 춘천시 남면 발산중학교 1학년 1반 류창수 고슴도치같이 머리카락 하늘로 치솟은 아이 뻐드렁 이빨, 그래서 더욱 천진하게만 보이는 아이, 점심시간이면 아이는 늘 혼자가 된다 혼자 먹는 도시락, 내가 살짝 도둑질하듯 그의 도시락을 훔쳐볼 때면 아이는 씩- 웃는다 ..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2
칠성동 저녁노을/류상덕 칠성동 저녁노을/류상덕 눈을 감고 귀 열었다. 얘야 문 두드려라. 은행나무 받쳐 든 그 너머에 저녁노을 처마에 걸어 놓았다 자죽자죽 밟고 오렴 저 빛살 지려나보다 어스름이 내리는데 이 산 저 산 실을 걸어 그리운 말 다 풀어도 가슴엔 고운 빛깔이 너를 밝혀 떠 있다 기다리다 기다리..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2
용산성당/조용미 용산성당/조용미 사제 김재문 미카엘의 묘 1954 충남 서천 출생 1979 사제 서품 1980 善終 천주교 용산교회 사제 묘역 첫째 줄 오른편 맨 구석 자리에 있는 묘비석 단 세 줄로 요약되는 한 사람의 生이 드문드문 네모난 봉분 위에 제비꽃을 피우고 있다 돌에 새겨진 짧은 연대기로 그를 알 수..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2
자본론/백무산 자본론/백무산 줄잡아 그의 재산이 5조원을 넘는단다 그 돈은 일년에 천만원 받는 노동자 50만년 치에 해당한다 한 인간이 한 세대에 50만년이라는 인간의 시간을 착취했다 50만년! 불과 1만년 전에 인간은 처음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5만년 전에 크로마뇽인은 돌과 동물의 뼈로 은신처를 ..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2
정오의 언덕/서정주 정오의 언덕/서정주 보지마라, 너 눈물어린 눈으로는... 소란한 홍소(哄笑)의 정오천심(正午天心)에 다붙은 내 입술의 피묻은 입맞춤과 무한 욕망의 그윽한 이 전율을... 아--- 어찌 참을것이냐! 슬픈 이는 모두 파촉(巴蜀)으로 갔어도 윙윙거리는 불벌의 떼를 꿀과 함께 나는 가슴으로 먹었..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