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도시락1/이영춘
춘천시 남면 발산중학교 1학년 1반 류창수
고슴도치같이 머리카락 하늘로 치솟은 아이
뻐드렁 이빨, 그래서 더욱 천진하게만 보이는 아이,
점심시간이면 아이는 늘 혼자가 된다
혼자 먹는 도시락, 내가 살짝 도둑질하듯 그의 도시락을
훔쳐볼 때면 아이는 씩- 웃는다 웃음 속에서 묻어나는 쓸쓸함,
어머니 없는 그 아이는 자기가 만든 반찬과 밥이 부끄러워
도시락 속으로 숨고 싶은 것이다 도시락 속에 숨어서 울고 싶은 것이다.
어른들은 왜 싸우고 헤어지고 또 만나는 것인지?
깍두기조각 같은 슬픔이 그의 도시락 속에서
빼꼼히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시선집 『오줌발, 별꽃무늬』 (시와소금, 2016)-
시선집에 수록된 <슬픈 도시락1>은 1999년 간행한 여덟 번째 시집의 표제 시이다. 2003년 원주여고 교장을 마지막으로 현직에서 은퇴한 시인이 발산중학교에서 근무(교감)한 때는 1996년과 1997년쯤일 것으로 짐작된다. 기억을 되살려보면 이 시기는 IMF 구제금융 요청으로 국가부도 위기 직전 상황이었다. 기업의 연쇄도산과 실업률의 급격한 증가, 수출부진에 따른 경상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당시 반도체와 철강 등 주력 품목 수출이 추락을 거듭하는 가운데서도 사치성 소비재 수입은 늘었다.
거시경제지표 이면의 체감 경기는 더욱 심각했다. 명예퇴직의 폭풍이 밀어닥친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경제 현실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한다는 주식 시세도 1년 새 반 토막이 되었다. 이 여파가 ‘발산중학교 1학년 1반 류창수’의 도시락에까지 미쳤을 것이다. 물론 결정적인 원인은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결손 가정이라는 환경일 수 있겠지만, 어쩌면 이혼하고 엄마 없는 아이로 남은 것도 어려운 경제 현실이 작용했을지 모른다. 아이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시선을 가만 따라 가기만 하는데 눈가를 촉촉하게 하는 이 시는 분명 최루성 짙은 시다.
"시는 나의 구원이며 나의 존재확인입니다" 강원도 시단을 대표해온 이영춘 시인은 시 쓰기의 치열함을 강조한다. 그는 무엇보다 '고독'이 글쓰기의 원천이라고 했다. 봉평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원주여고로 진학하면서 외롭고 가난하기 때문에 안으로 무언가를 삼키며 하얀 백지와 대화해야 했다고 고백한다. 여고생의 눈물로 얼룩진 글쓰기는 그를 자연스럽게 경희대 국문과로 이끌었다. 대학 졸업 후 잠시 강원일보사 문화부 기자로 근무했으나 1964년부터 교사로서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1976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다.
초기에는 주로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의식, 내면의식의 고뇌 같은 것을 많이 그려내려고 애썼다. 바로 원초적이고도 근원적인 인간존재 문제를 다룬 '시지포스의 돌'이 그렇다. 그러나 중반기 이후에는 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 또는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같은 것을 다룬 시들이 많다. '난 자꾸 눈물이 난다'와 바로 이 '슬픈 도시락' 등이 여기에 속한다.아이 가르치는 현장에서 느낀 그대로를 시로 옮기면서 그런 인간의 문제와 사회의 부조리를 동시에 드러내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르트르가 '존재가 본질에 앞서는가'로 고민했듯 '시가 본질에 앞서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때 우리는 시의 역할과 효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것은 내 앞의 모든 운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과도 같아, 어쩌면 주위의 가난과 부조리는 우리 모두에게 형벌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시인에겐 써야 할 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분노 또한 우리가 써야할 시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나. 도시락 속에서 빼꼼 세상을 내다보는 ‘깍두기조각 같은 슬픔’이 20년 전의 일이기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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