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쌀과 살/ 손일수

모든 2 2018. 4. 12. 00:20

 

쌀과 살/ 손일수

 

나는

쌀이라 하는데

포항 사시는 할머니는

살이라고 해요

 

“할머니, 살이 아니고 쌀.”

“그래, 살이 아니고 살.”

아무리 말해도

할머니는 쌀을

살이라 해요

 

쌀밥을 많이 먹어

밥심으로

농사짓는다는 할머니

 

할머니가 말하는

‘살’은

쌀도 되고

살도 되고

힘도 되지요

 

- 동시집『힘센 엄마』(푸른사상, 2013)

 

 

 지난해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 대상에 선정되어 지원금 1천만 원을 받아 최근 출간한 동시집이『힘센 엄마』이다. 문학적 성과에 대해 시상하는 일반 문학상과는 달리 문학적 잠재역량을 보고 등을 밀어주는 제도이므로 등단 10년 이내의 문인들에겐 선망의 제도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지원금 1천만 원은 어느 문학상의 상금 못지않은 수준이다. 단 종전과는 달리 최근 5년간의 활동 증거자료를 요구하고 있어 작품 발표 등 활발한 문학 활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작품 발표를 아예 기피하면서까지 이를 겨냥해서는 안 될 일이다. 

 

 동시를 어린이들이 쓴 어린이시와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현대의 동시는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즐기며 읽는 장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동시라고 해서 꼭 어린이를 화자로 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며, 요즘의 동시는 동심이 바탕에 깔린 현대시 한 편이라 해도 무방할 작품들이 많이 있다. 이 시도 친숙하면서도 기발한 소재를 동시적 화법으로 시화하여 독자와의 소통을 넓혀나간 작품이라 하겠다.


 흔히 경상도 사람들의 사투리습관을 희화하는 용례로서 이 ‘쌀과 살’을 들먹거리지만 경상도 사람이라고 해서 ‘쌀’을 발음 못해 ‘살’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 구강구조가 잘 못되어 쌍시옷 발음을 못하는 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포항출신 이병석 국회부의장이 국회 본회의 진행도중 '쌀'을 '살'로 발음한 것을 두고 의원들이 장난스럽게 이를 호통하자 본회의장이 웃음바다가 됐다는 얘길 들었는데, 빵 터진 것은 이 부의장이 웃음을 머금으며 단호하게 ‘저는 죽을 때까지 이 발음을 구분할 수 없다’고 한 대목이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그냥 오래전부터 쌀을 살이라고 발음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뿐이다. 실제로 ‘쌀’의 어원이 사람의 ‘살(肉)’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쌀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므로 쌀을 먹으면 살이 되기 때문에 ‘살’이 ‘쌀’이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쌀이기 이전에 살이어서 하나도 우스울 게 없는 것이다. 그리고 쌀은 우리 민족에게 살과 피, 그리고 정신 그 자체이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한다. 농경문화를 이어온 우리 조상들은 쌀에도 생명과 영혼이 담겨 있다고 믿어 왔다. 볍씨에서 나락으로 가을에 열매를 거둬들이는 과정은 곧 사람의 일평생 과정이며, 쌀을 먹는 사람은 쌀의 영혼과 힘을 받아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여겼다. 앞으론 “할머니, 살이 아니고 쌀.”이라고 채근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 시 이후로 ‘쌀’을 ‘살’로 발음한다고 해서 히쭉히쭉 웃거나 실실 쪼개는 일은 없기를 희망한다.

 

-권순진의 시 맛있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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