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작은 배/조동진

모든 2 2018. 4. 12. 00:26

 

 

작은 배/조동진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시집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 (청맥, 1991)-

 


 

 

  시집에 수록된 노랫말이다. 시집에는 이 노랫말에 얽힌 사연을 함께 실었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낯익은 길을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지난 일들이 떠오르게 마련인데, 때로는 막연한 느낌으로, 때로는 마치 오래 된 벽화처럼 희미한 그림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특히 계절이 바뀔 때이거나, 갑자기 다른 분위기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가슴 뭉클하게 되살아나는 기억들...” “어쩌다가 남대문 시장을 지나게 되면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음식점들과 만나게 되고 그 허름한 음식점들 앞에 일렬로 얹혀진 삶은 돼지머리들을 상봉하게 되는데, 오래 전에 유행하던 스마일 배지처럼 하나같이 웃는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던지고 있는 그 돼지머리들...나는 그걸 볼 때마다 언뜻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꼭 20년 전 늦은 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정릉 골짜기에서 나는 한 사람의 시인을 만날 수 있었다. 아직 여드름이 채 가시지 않은 우리 젊은 녀석들에게 갑자기 뛰어든 겨울 햇살처럼 씩 웃으며 나타났다가 어느새 휙 사라지곤 하던, 깡마른 체구에 뭔가 털어 버리려는 듯 털털거리며 걷는 불규칙한 걸음걸이. 이따금 분위기가 좋아지면 목소리를 한 옥타브 즈음 올려서 목탁 대신 젓가락을 두드리며 아기중의 염불소리를 흉내 내던 시인의 그 황량한 목소리. 어느 날 시인은, 겨우살이를 맞은 어린 짐승들처럼 아랫목을 찾아 웅크리고 앉은 우리들을 향해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시장바닥에 죽어서도 히죽히죽 웃고 있는 돼지대가리를 보면, 우리의 고민이 무색해져!" ”

 

  “우리들은 아주 잠시 동안 시인의 말이 '에코'가 되어서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고, 그 알량한 우리의 고민거리들이 갑자기 얼마나 초라한 꼴이 되어 버렸는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짧은 겨울 해 탓인지 우리는 시인에 대한 문학적 호기심도 가져볼 겨를 없이 마치 오랜만에 만남 악동들처럼 그렇게 떠들썩한 겨울을 치르고 나서는 봄도 채 되기도 전에 뿔뿔이 흩어졌다. 길다면 긴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오직 시인의 돼지머리와 그 분이 내게 적어준 짧은 시 한편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조동진이 친구의 부모님이 경영하던 정릉 ‘청수장’에서 그곳에 자주 놀러왔던 고은 시인으로부터 건네받은 것이 바로 이 ‘작은 배’ 노랫말이다. 그는 얼마 후 이 짤막한 시에다가 아주 단순한 멜로디를 붙였다.

 

  그러니까 엄밀하게는 ‘고은’ 작시라고 해야 온당할 것이나, 그게 시로 발표된 것이 아니고 반복구가 있어 일단 조동진 작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우리의 한계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더는 어쩔 수 없는 그래서 때때로 서로의 손을 맞잡아야만 하는 우리들의 한계 상황. 그것은 슬픈 것일 수도 그래서 또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한계란,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만이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그것마저도 우리들에게 겸손과 사랑을 깨우치게 한다. 이렇게 춥고 어두운 밤 당신의 작은 배는 어느 얼어붙은 강가에 발이 묶여 있는 것인지........”라고 말을 끝맺는다. 이 시집이 어떤 연유로 내 집에 있는지 모르겠으나 지난번 이사 때 버리려다 그러지 못했다.

 

  조동진은 그의 노래처럼 참 잔잔하고 과묵한 사람이다. 그가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활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는 그의 기질 탓도 있겠다. 80년대 초 고통을 머금은 듯한 그윽한 목소리 ‘행복한 사람’과 ‘나뭇잎 사이로’가 소리 소문 없이 전파를 한창 타기 시작했을 때,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그가 초대되었다. 진행자와 말을 주고받는동안 그가 했던 말이라고는 ‘예’ ‘글쎄요’ 정도였다. 구체적인 답변을 이끌어내는 질문에도 묵묵부답 고개만 끄덕였다. 라디오 방송에는 5초 이상 묵음이면 방송 사고다. 그는 이날의 ‘대형’방송사고 이후 어디서도 그를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요즘 가수는 노래만 잘해서는 안 되고 ‘예능빨’도 필요하다지만, 그게 안 되는 가수도 있다. 그런 시인은 더 많다.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와 같은 올해 71세인 조동진은 시인이다. 천상 음유 시인이다.

 

-권순진의 시 맛있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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