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계구우후의 논리/ 박종인

모든 2 2018. 4. 12. 00:16

 

계구우후의 논리/ 박종인

 

뒤로 걷는다는 것은 과거를 거스르듯 더 많은 것을 품어 안는 것 흘러간 역사를 껴안는다는 것 하늘을 마주 보며 더 많은 세상을 본다는 것

 

한 발을 뒤로 옮길 때마다 어제가 끼어들고 풍경이 한 아름 시야에 들어오고 구름이 빠른 행보로 이동해 내 안에 들어오고 역사의 아픔이 나를 차지하고 과거의 하늘, 5.18을 더듬고 젊고 어린 날을 거슬러 결국 자궁 속으로 생의 이전으로 태초로 달아나는 것들을 안아보는 것 깎아지른 절벽처럼 막아서는 것 저만큼 가 있던 정신이 퍼뜩 돌아오는 것 어쩌면 뒤로 걷는 것은 후진이 아닌가 뒤로 걷는 것은 퇴보가 아닌가 뒤로 걷는 것은 퇴화가 아닌가 뒤로 걷는 것은 앞을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문득, 나와 마주치는 것들에게 뒤란 무엇일까?를 건네고 싶은 그런 어떤 것

 

공원 의자에 앉아 왜곡된 사건들에게 몸을 추스르다 흘끗 본 앞이 아닌 뒤는 어둡고 눅눅하다 그림자는 늘 바닥에 누워 발에 밟힌다

 

- 계간『시향』2013년 여름호-

 

 

   "삶을 돌이켜보면 때로는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존재의 어떤 차원에서 보면 그 당시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행동이었고, 언젠가는 그것이 뒷걸음질이 아니라 앞으로 내디딘 발걸음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어바웃 타임'을 보면서 생각났던 '말로 모건'의 말이다. 뒤로 걷는다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행동은 아니지만 '흘러간 역사를 껴안는다는 것'이고 '하늘을 마주 보며 더 많은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영화 '변호인'에서는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이 당시 불온서적인 것으로 얼핏 비쳐 소개되었지만 수십 년간 대학생 필독서인 이 책의 핵심키워드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개념이다. 객관적 사실을 중시한 랑케의 실증사학이 주류를 이루었던 19세기에 카는 정면으로 이에 맞섰다. 카는 역사상의 사실은 순수한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순수하게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없다며 언제나 기록자의 마음을 통해서 굴절되어져 왔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역사란 역사가들에 의해 취사선택된 기록들이며, 나아가서 승자의 기록이거나 패자의 변명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리고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인식하고 해석하자는 것도 역사가의 주관과 입맛에 따라 기술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따라서 카는 역사책을 읽기에 앞서 그 역사가를 연구해야 하며,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앞서 그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간파하라고 했다. 역사가의 책무가 얼마나 막중한지를 잘 설명하는 대목이다. 역사 왜곡은 국가라는 단위가 행하는 거대한 위선의 다름 아니며, 그 거짓은 국가와 민족의 존엄을 추락시킬 수 있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정파적 이익에 맞춰 교과서를 개편한다는 자체가 역사적 난센스며 부끄러운 일이다. '계구우후'란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소꼬리는 되지 말라는 뜻으로, 역사적 인식에서 주체적인 민족주의 사학을 강조하는 말처럼 들린다. 단재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문일평 등으로 이어지는 민족적 얼과 혼을 강조하는 정신사관으로 자연히 우리 역사의 치욕적인 부분 보다는 영광스러운 부분을 드러내며 집중 조명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해도 사실의 왜곡이나 지나친 과장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그림자는 늘 바닥에 누워 발에 밟히'지만 객관성을 담보하는 역사의 그림자만이 '계구우후의 논리'를 정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권순진의 시 맛있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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