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67

행복론/ 최영미

행복론/ 최영미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 시집 중에서 -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이름이 알려진 최..

정오의 언덕/ 서정주

정오의 언덕/ 서정주 보지마라, 너 눈물어린 눈으로는... 소란한 홍소(哄笑)의 정오천심(正午天心)에 다붙은 내 입술의 피묻은 입맞춤과 무한 욕망의 그윽한 이 전율을... 아--- 어찌 참을것이냐! 슬픈 이는 모두 파촉(巴蜀)으로 갔어도 윙윙거리는 불벌의 떼를 꿀과 함께 나는 가슴으로 먹었노라 시악시야! 나는 아름답구나 내 살결은 수피(樹皮)의 검은 빛 황금 태양을 머리에 달고 몰약(沒藥) 사향(麝香)의 훈훈한 이 꽃자리 내 숫사슴의 춤추며 뛰어가자 웃음 웃는 짐승, 짐승 속으로. - 문예지 ‘조광(1939년 3월)’ - 이 시의 무대는 제주 서귀포 앞 바다의 ‘지귀도’란 섬으로 젊은 시절 미당이 석 달간을 머물면서 당시 방목된 사슴들을 배경으로 쓴 시다. 지금은 낚시꾼과 바다 다이버들만 즐겨 찾는 이 ..

여자를 위하여/ 이기철

여자를 위하여/ 이기철 너를 이 세상의 것이게 한 사람이 여자다 너의 손가락이 다섯 개임을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 너에게 숟가락질과 신발 신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 여자다 생애 동안 일만 번은 흰 종이 위에 써야 할 이 세상 오직 하나 뿐인 네 이름을 모음으로 가르친 사람 태어나 최초의 언어로, 어머니라고 네 불렀던 사람이 여자다. 네 청년이 되어 처음으로 세상에 패배한 뒤 술 취해 쓰러지며 그의 이름을 부르거나 기차를 타고 밤 속을 달리며 전화를 걸 사람도 여자다 그를 만나 비로소 너의 육체가 완성에 도달할 사람 그래서 종교와 윤리가 열번 가르치고 열번 반성케 한 성욕과 쾌락을 선물로 준 사람도 여자다 그러나 어느 인생에도 황혼은 있어 네 걸어온 발자국 헤며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 때 이미 윤기 잃은 네 ..

여자/ 김운향

여자/ 김운향 나비들은 저마다 꿀만 탐하다가 날아갔다. 꽃은 날아가려다 말고 이젠 아름다운 별만을 쳐다본다. 그립다 외롭다 말 못하고 홀로 바람 속의 말씀만을 듣는다 오늘도 늑대 울음소리 들리는 이 벌판에서 꽃은 그래도 아름다운 별의 말씀만을 듣는다. - 월간 '스토리문학' 2009년 1월호 - 이 시에서 꽃은 여성, 나비는 남성을 상징하는 전혀 낯설지 않은 전통적인 은유를 채택했다. 꿀만 취하고 날아간 나비, 따라나서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그리움만 켜켜이 쌓아 올리는 꽃. 이만하면 감춰진 메시지의 구도는 대충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오늘도 늑대 울음소리 들리는 이 벌판에서 꽃은 그래도 아름다운 별의 말씀만을 듣는다’니 지고지순의 사랑을 지키는 순종형 여인네의 미덕이 고스란히 녹아있기는 한데, 과연 지금..

바람폭포에서/ 곽미영

바람폭포에서/ 곽미영 월출산으로 간다 바람을 만나러 간다 이미 몇 해 전 부터 그를 가슴에 안고 살아온 그녀는 한번씩 그가 일렁일 때마다 몽유병처럼 일어나 그에게로 간다 숲이 품고있는 길은 대낮에도 어둡다 어둠을 밟고 바람에게 간다 당초 바람은 형상이 없다고 믿었던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어둠이 끝나고 빛이 시작되는 곳에서 그가 부챗살처럼 펼쳐놓은 바람이 쏟아져 내린다 - 시하늘 2008년 겨울호 - ‘정신이 막히면 속이 답답하고, 세상 구경하는 것이 협소하면 시야가 좁아진다. 보지도 않고 세상에 대해 추측하지 말고 직접 보아야 안목이 넓어지는 데, 여행이 바로 그것을 이뤄준다’ 이는 조선 후기에 살았던 정란이란 선비가 자신의 여행이 갖는 의미를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친구 신국빈은 ..

우리는 어디서나 / 오규원

우리는 어디서나 / 오규원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앉으면 중심이 다시 잡힌다.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일어서기 위해 앉는다. 만나기 위해서도 앉고 협잡을 위해서도 앉고 의자 위에도 앉고 책상 옆에도 앉듯 역사의 밑바닥에도 앉는다. 가볍게도 앉고 무겁게도 앉고 청탁불문 장소불문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밑을 보기 위해서도 앉고 바닥을 보기 위해서도 앉는다. 바로 보기 위해 어깨를 낮추듯 -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문학과 지성사)' 중에서 - 오규원 시인의 소품에 가까운 시로 문학적 완성도 보다는 숨은 메시지가 눈에 뛴다. 의자에 머문 시인의 시선에서 '바로 보기 위해 어깨를 낮추듯'이란 지혜를 발견한다. 쉽게 읽히다가 '역사의 밑바닥에도 앉는다'는 대목에 잠시 주춤해지는데 마지막 연과 연결..

제라늄/ 박정남

제라늄/ 박정남 일 년 내내 붉은 꽃을 피워대는 제라늄은 그 붉은빛 자체로 꽃숭어리가 뜨거워 들여다보는 내 얼굴도 화끈거려 주렁주렁 붉은 성기들을 쏟아 내놓는 제라늄이 언제부터인가 두 딸뿐인 내 음이 강한 집을 밝게 비춘다 그 줄기차게 피워대는 생식성 때문에 집에 들이게 된 우리 집의 사철 붉은 젊은 남성 아침마다 환하게 웃으며 딸들이 물뿌리개를 들고 달려가 물을 준다 - 시집 '명자' 중에서 - 음의 소굴(?)에 들인 양의 붉은 생식성이라니 화끈거릴 만 했겠다. 하지만 시인이 부러 양의 기운을 집에다 들이려 그 꽃을 키우진 않았을 게다. 그저 꽃이 예뻐서 그 모던한 꽃 이름에 끌려서 집에다 들였을 터인데, 무엇보다 제라늄의 매력은 사철 붉은 꽃을 피우는데 있는 모양이다. 시인은 그 붉은 꽃을 성기라고 ..

좀팽이처럼 / 김광규

좀팽이처럼 / 김광규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 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

버스를 기다리며/ 정희성

버스를 기다리며/ 정희성 주머니를 뒤지니 동전이 나온다 100원을 뒤집으니 세종대왕이 나오고 50원을 뒤집으니 벼이삭이 나온다 퇴근길 버스 정거장에서 동전을 뒤집으며 앞에 선 여자 궁둥이도 훔쳐 보며 동전밖에 없어 갈 곳은 없고 갈 곳 없어 아득하여라 조정에선 이 좋은 날 무엇을 할까 나으리들은 배포가 커서 끄떡도 않는데 신문에 나온 여공의 죽음을 보고 동전밖에 없는 제 자신도 잊은 채 울먹이는 나는 얼마나 작으냐 말 한마디 큰 소리로 못하고 땡볕에서 동전이나 뒤집으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다보탑 뒤집으니 10원이 나온다 주머니를 뒤집으면 먼지가 나오고 먼지를 뒤집으면 뭐가 나올까 생각하며 땡볕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무엇이든 한 번 뒤집기만 하면 다른 것이 나오는 게 신기해서 일없이 일없이 동전을 뒤..

콩나물에 대한 예의 / 복효근

콩나물에 대한 예의 / 복효근 콩나물을 다듬는답시고 아무래도 나는 뿌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무슨 알량한 휴머니즘이냐고 누가 핀잔한대도 콩나물도 근본은 있어야지 않느냐 그 위를 향한 발돋움의 흔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하지는 못하겠다 아무래도 나는 콩나물 대가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죄 없는 콩알들을 어둠 속에 가두고 물 먹인 죄도 죄려니와 너와 나 감당 못할 결핍과 슬픔과 욕망으로 부풀은 대가리 쥐뜯으며 캄캄하게 울어본 날들이 있잖느냐 무슨 넝마 같은 낭만이냐 하겠지만 넝마에게도 예의는 차리겠다 그래, 나는 콩나물에게 해탈을 돕는 마음으로 겨우 콩나물의 모자나 벗겨주는 것이다 - 시집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중에서 - 시인은 여성도 아니고, 살림을 도맡아 사는 형편도 아닌 것 같은데 콩나물 다듬는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