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67

먼 불빛 / 이태수

먼 불빛 / 이태수 왜 이토록이나 떠돌고 헛돌았지 남은 거라고는 바람과 먼지 저물기 전에 또 어디로 가야 하지 등 떠미는 저 먼지와 바람 차마 못 버려서 지고 있는 이 짐과 허공의 빈 메아리 그래도 지워질 듯 지워지지는 않는 무명(無明) 속 먼 불빛 한 가닥 ― 신작시집 『회화나무 그늘/문학과지성사.2008』중에서 - 이슬방울과 유리알의 글썽임과 투명함에서 바람과 먼지, 그리고 쳇바퀴로 그의 시어가 옮겨왔다. 명징한 것들에서 허무의 색깔이 배어 나왔다. 어쩌면 그 배경에는 34년간 몸담았던 신문사를 떠나면서 갖는 소회의 일단이 개입되었지 싶기도 하다. 더구나 먼저 세상을 떠나보낸 아우를 기리는 마음까지 보태졌으니 그 색깔은 잿빛 언저리일 수밖에 없겠다. 아울러 독자들에게도 더 깊은 사유와 철학을 요구하고..

나뭇잎 하나/ 김광규

나뭇잎 하나/ 김광규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고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문득 혼자서 떨어졌다 저마다 한 개씩 돋아나 여럿이 모여서 한여름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개씩 떨어져 그 많은 나뭇잎들 사라지는 것을 보여 주면서 - 시집 「좀팽이처럼/1988,문학과 지성」 중에서 - 모든 존재는 하나의 나뭇잎처럼 홀로 태어나 무리를 이루고 살다가 다시 홀로 죽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뒤늦게 발견한다는 내..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수 있다면/ 장정일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수 있다면/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중에서 - 패러디는 어떤 작품을 모방해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으로, 비판적 의도로 쓰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시는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하여 ‘사랑’을 풍자한 독자적 문학 행위인 동시에 전혀 새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춘수의 꽃이 ..

먹어도 먹어도 / 이대흠

먹어도 먹어도 / 이대흠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는 농심 새우깡처럼, 아무리 그리워해도 나의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고, 바삭바삭 금방 무너질 듯 마른기침을 토하며, 그리워 그리워해도 그리움은, 질리지 않고, 물 같은 당신께 닿으면 한꺼번에 녹아버릴 듯, 왠지 당신의 이름만 떠올라도 불길처럼,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그리움은. -창비 시집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중에서 -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다는 말은 새우깡 회사의 광고 카피다.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고, 질리지 않는 것은 그리움도 마찬가지란다. 그립다가, 그리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가벼운 새우깡처럼 금방 녹아버릴 태세다. 새우깡 한 조각 입에 넣고 곧장 다른 한 조각이 입으로 들어가는 사이 추억의 틈새가 열리고, 그리움도 따라 열..

늙은 시인의 가을은/ 백형석

늙은 시인의 가을은/ 백형석 하늘을 베껴쓰다 절필한 늙은 시인 외출한 점을 불러 골골이 성을 쌓네 명치끝 숨은 강위에 울며읽는 연서로 너와의 싸움에서 백기를 들때까지 이마에 솟는 피로 청춘을 쓰다 보면 지나온 발자욱 까지 가을빛이 되는가 토하는 선혈보다 객기가 눈부시다 내 너와 어우러져 어깨로 취할것을 산 하나 옮겨논 뜰엔 온종일 술이 익네 울어도 눈물 없는 가을의 시인처럼 안으로 울고 있는 가을의 여인처럼 겉으로 늙어 가는가 목이쉬는 하늘아 - 계간 '시하늘'2004년 겨울호에서 - 생의 상처에 맞서는 강렬한 힘이 일상의 사소한 깨달음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을 시를 통해 유연하게 증명해 보였던 러시아의 예세닌은 27세 때 자신보다 17년 연상인 미국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별과 재..

11월 / 나희덕

11월 / 나희덕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 시집 '뿌리에게' 중에서 - 등에 책가방을 짊어지고 다닐 때 왜 입동이 양력으로 11월에 있으며, 입춘이 2월에 소속되어야 하는가를 의심했지만 누군가에게 제대로 물어본 일은 없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렸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나라라는 사실과 함께 일년 열두 달을 공평하게 나눠 갖는다고 믿은 까닭이다. 3,4,5월..

미안하다 / 정호승

미안하다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중에서 - 시를 천천히 다 읽을 즈음 ‘사랑해서 미안해’란 트로트 노래의 곡조가 생각났다면 생뚱맞아도 한참 생뚱맞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의 가는 눈웃음까지 떠올랐다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거다. 어쨌거나 이 시를 다 읽고 나서도 ‘그대 바라보면 황홀해’라며 목청을 높이는 대목까지 진도가 나갔다면 감상의 방해를 넘어 고해성사 도중에 끼어든 각설이타령 격이다. 험난한 과정 다 겪고 유통기한 다 지난 뒤에도 너에게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너의 마음 깊..

애가 / 엄원태

애가 / 엄원태 이 저녁엔 노을 핏빛을 빌려 첼로의 저음 현이 되겠다. 결국 혼자 우는 것일 테지만 거기 멀리 있는 너도 오래전부터 울고 있다는 걸 안다 네가 날카로운 선율로 가슴 찢어발기듯 흐느끼는 동안 나는 통주저음으로 네 슬픔 떠받쳐주리라 우리는 외따로 떨어졌지만 함께 울고 있는 거다 오래 말하지 못한 입, 잡지 못한 가는 손가락, 안아보지 못한 어깨, 오래 입맞추지 못한 마른 입술로 ...... - 시집 '물방울 무덤' 중에서 - 비오는 날, 비 내리는 창밖을 보며, 첫 사랑의 마른 입술을 힘겹게 추억한 채 양껏 무게를 내려놓고 들었어야할 음악을 그리 듣지 못한 건 불운이고 불찰이며 무지였다. 속으로 소리를 삼키며 우는 바흐의 ‘샤콘느’를 듣기 전까지는 소리를 죄면서 우는 ‘지상에서 가장 슬픈 곡..

녹슨 못을 보았다. 나는/ 송진환

녹슨 못을 보았다. 나는/ 송진환 길을 가다 문득 녹슨 못 하나 보았다 얼마나 거기 오래 있었을까 벌겋게 시간 속을 삭고 있다. 허리는 꺾인 채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게다 손바닥에 올려본 못은 세월의 부스러기들 비늘처럼 털어 내며 허리는 이내 부러질 듯하다 순간 나도 온몸의 살들 떨어져나가고 녹슨 못처럼 뼈만 앙상히 남는다 언젠가 저 못처럼 뼈마저 삭아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을 허우적거리며 오늘도 바삐 가고 있다 『조롱당하다』(2006, 만인사)중에서 생각해 보라, 어느 누가 길을 가다 땅 속에 박힌 못을 볼 수 있는지. 그 못 앞에 잠시 멈춰 설 수 있는지. 그 못이 3,40년 뒤의 자기 몸처럼 느껴지겠는지. 그래서 동격인 녹슨 못 앞에서 잠깐 죽었다 다시 깨어날 수 있겠는지를. 시인이 아니면 도무지 어..

바다경전/ 박창기

바다경전/ 박창기 뭍에 있어도 마음은 자꾸 바다로 달린다. 뜻도 모르면서 바다경전에 푹 빠져서는 읽기만 했었던 나에게 최초의 시는 바다였다. 온몸으로 읽는다고 아랑곳하지 않은 채 교만에 찌든 허상에 매달려 있을 때 파도 꼭대기에서 떨어지던 나를 보고서는 경전의 가장자리에서 헤매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려 준 것도 파랑이었다, 파랑은 바다만이 뱉어내는 언어, 그 언어의 속살과 갈비뼈 사이에서 끊임없이 서슬 퍼런 채찍을 들었지만 외면한 쪽은 나였다. 만신창이가 된 이즘에 와서야 바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 바람은 나보다 경전을 더 잘 읽었다. 바람은 파랑을 수도 없이 데리고 경전의 구석구석을 다독이듯 읽었다. 그 큰손으로 바다를 다루는데 파도 같은 경전이 어쩌지 못하는 걸 보면 보잘것없는 나를 변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