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67

조용한 일/ 김사인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앉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창비시선집 가운데 - 딱히 맥 풀어질 일이나 느닷없는 외로움이 찾아든 것도 아닌데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휴대폰도 내던지고, 손목시계도 풀고, 안경도 벗어버립니다. 와이셔츠의 단추도 몇 개 풀어재끼고요. 내 몸 모두 헐렁히 연 채 빈둥거리는 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는 게지요. 아니 곁을 두리번거리는 것조차 번잡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억지로 평온을 찾고, 안정을 취할 그 무슨 사연이 있어서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럴 때는 이미 곁에 있는 모..

욕 심/ 공광규

욕 심/ 공광규 뒤꼍 대추나무 약한 바람에 허리가 뚝 꺾였다 사람들이 지나며 아깝다고 혀를 찼다 가지에 벌레 먹은 자국이 있었나? 과거에 남 모를 깊은 상처가 있었나? 아니면 바람이 너무 드샜나? 그러나 나무 허리에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너무 많은 열매를 나무는 달고 있었다. -시집 '지독한 불륜' 실천문학사- 일반적으로 과수는 열매를 솎아주지 않으면 과실이 작아질 뿐 아니라 이듬해 해거리를 하게 되는 원인이 되므로 반드시 솎아 주어야 한다. 이 대추나무는 그것과 다른 이유로 열매를 너무 많이 달고 있어 가지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꺾였다. 이런저런 다른 이유를 먼저 찾아봤지만 결국은 욕심 때문임을 알았다. 톨스토이의 우화에 한 가난한 농부 얘기가 있다. 이 농부는 평소 귀족들처럼 넓은 땅..

詩法 / 권기호

詩法 / 권기호 그 산정은 한번도 얼굴을 드러낸 일이 없다 노련한 알피니스트들도 그 발밑에서 점심이나 먹고 돌아올 뿐이다. 그 미립자의 얼굴은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죽은 나의 발톱에서나 뛰는 심장에 이르기까지 움직이고 있는 그 무엇이란 것만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그 우주의 벽은 어디쯤에서 닿을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지금 보내고 있는 가장 강한 전파로도 다만 은하계와 은하계가 끝없이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만 추측할 뿐이다. - 대구시인협회 발행 '1999년 대구의 시'- 인간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방황하게 된다고 괴테는 말했다. 알면 알수록 더 어렵다는 말과도 통하며, 그 방황은 더 소중한 것과 높은 곳을 향한 모색의 의미로도 읽혀진다. 그러나 끊임없는 수련과 탐구..

시의 경제학/정다혜

시의 경제학/정다혜 시 한 편 순산하려고 온몸 비틀다가 깜박 잊어 삶던 빨래를 까맣게 태워버렸네요 남편의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을 내 시 한 편과 바꿔버렸네요 어떤 시인은 시 한 편으로 문학상을 받고 어떤 시인은 꽤 많은 원고료를 받았다는데 나는 시 써서 벌기는커녕 어림잡아 오만 원 이상을 날려버렸네요 태워버린 것은 빨래뿐만이 아니라 빨래 삶는 대야까지 새까맣게 태워 버려 그걸 닦을 생각에 머릿속이 더 새까맣게 타네요 원고료는 잡지구독으로 대체되는 시인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시의 경제는 언제나 마이너스 오늘은 빨래를 태워버렸지만 다음엔 무얼 태워버릴지 속은 속대로 타는데요 혹시 이 시 수록해주고 원고료 대신 남편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 보내줄 착한 사마리언 어디 없나요 -불교문예 2008 여름호..

매미소리/ 임영조

매미소리/ 임영조 감나무 가지 매미가 악쓰면 벚나무 그늘 매미도 악쓴다. 그 무슨 열 받을 일이 많은지 낮에도 울고 밤에도 운다. 조용히들 내 소리나 들어라 매음매음… 씨이이… 십팔십팔 저 데뷔작 한 편이 대표작일까 경으로 읽자니 날라리로 읽히고 노래로 음역하면 상스럽게 들린다. -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파람새는 수컷이 암컷에게 구애를 할 때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한다. 암컷은 수컷의 가창력도 살피지만 무엇보다 레퍼토리의 다양성에 더 점수를 준다. “호오, 호케꼬, 케꼬” 노래하며 간간히 바이브레이션을 넣기도 한다. 사랑의 고행은 매미도 마찬가지다.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라며 안도현 시인이 ‘사랑’이란 시에서 말했듯 막바지 여름 ..

열정/김은영

열정/김은영 담쟁이 새잎처럼 사랑이 줄을 탑니다 우리들 아련한 가슴이 맞닿아 저려와도 잡은 손 놓을 수 없습니다 서로를 쳐다보는 눈이 울고 있지만 볼 수가 없음을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시작이라 말 한적 없으므로 끝 또한 없겠지요 다만 몇 억겁 전부터 지어졌던 인연을 따라 갈 뿐입니다 운명이 길을 내면 앞선 그 뒤를 기쁨 마음으로 가겠습니다 가는 내내 웃음 잃지 않아 행여 그가 뒤를 돌아보는 의심 않도록 할 것입니다 그 길을 다 지나 험한 길 어떻게 왔냐고 물으면 반듯한 어깨만 보고 따라 왔다 말 할겁니다 - 시집 ‘나비’중에서 - 시를 쓸 때는 아무리 ‘사랑’이란 말이 하고 싶어 죽겠어도 그 말을 쉽게 쓰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아껴 쓰라는 말이 아니라 아예 꺼내지도 말랍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첫 줄에 그..

사람의 일 / 천양희

사람의 일 / 천양희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말 드라마는 온통 사랑과 증오, 사랑과 질투, 사랑과 전쟁, 사랑과 이별로 도배되었다. 사랑과 아스피린, 사랑과 비아그라, 사랑과 찹스테이크, 사랑과 다크쵸클릿, 그리고 사랑과 자본주의. 50년 가까이 된 '태양은 가득히'의 아랑드..

식당의자 / 문인수

식당의자 / 문인수 장맛비 속에, 수성못 유원지 도로가에, 삼초식당 천막 안에, 흰 플라스틱 의자 하나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있다. 뼈만 남아 덜거덕거리던 소리도 비에 씻겼는지 없다. 부 산하게 끌려 다니지 않으니, 앙상한 다리 네 개가 이제 또렷하게 보인다. 털도 없고 짖지도 않는 저 의자, 꼬리치며 펄쩍 뛰어오르거나 슬슬 기지도 않는 저 의자, 오히려 잠잠 백합 핀 것 같다. 오랜 충복을 부를 때처럼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 로 붙여주고 싶은 저 의자, 속을 다 파낸 걸까,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 않는다. 상당기간 실로 모처럼 편안한, 등받이며 팔걸이가 있는 저 의자, 여름의 엉덩일까, 꽉 찬 먹구름이 무지근하게 내 마음을 자꾸 뭉게뭉게 뭉갠다. 생 활이 그렇다. 나도 요즘 휴가에 대해 이런 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

소나무를 만나/ 박곤걸

소나무를 만나/ 박곤걸 바람을 다스리지 못하겠거든 산으로 가서 소나무를 만나 말 대신 눈으로 귀를 열어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절제하고, 절단하고 바람이 부는 날 하늘에다 온몸으로 수화하는 나무의 설법에 큰절하고 잘 늙은 소나무가 손짓해 주는 그 곁에 가서 뿌리를 내려라 어느덧 산을 닮아 푸른 자태가 제격이면 바람도 솔잎에 찔려 피를 흘린다 - 시집 「하늘 말귀에 눈을 열고」 중에서 - 인디언들은 이 세상 모든 존재와 생명 심지어는 무생물의 자연까지 신성한 그 무엇이 있다고 믿으며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한다. 150년전 인디언 추장 '두발로 선 곰'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자연 속에서 배우는 것 뿐이며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고 말했다. 인간의 마음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 완고해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