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김은영
담쟁이 새잎처럼 사랑이 줄을 탑니다
우리들 아련한 가슴이 맞닿아 저려와도
잡은 손 놓을 수 없습니다
서로를 쳐다보는 눈이 울고 있지만
볼 수가 없음을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시작이라 말 한적 없으므로
끝 또한 없겠지요
다만 몇 억겁 전부터 지어졌던
인연을 따라 갈 뿐입니다
운명이 길을 내면 앞선 그 뒤를
기쁨 마음으로 가겠습니다
가는 내내 웃음 잃지 않아
행여 그가 뒤를 돌아보는 의심 않도록 할 것입니다
그 길을 다 지나
험한 길 어떻게 왔냐고 물으면
반듯한 어깨만 보고 따라 왔다 말 할겁니다
- 시집 ‘나비’중에서 -
시를 쓸 때는 아무리 ‘사랑’이란 말이 하고 싶어 죽겠어도 그 말을 쉽게 쓰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아껴 쓰라는 말이 아니라 아예 꺼내지도 말랍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첫 줄에 그만 그 말을 해버리고 마네요. 그만큼 간곡하고 화급한 탓이겠는데, 사실 사랑과 가난과 기침은 잘 숨겨지지 않는 법이지요. 근년 독신주의자들이 늘고 있지만 결혼과 관계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은 포기할 수 없는 삶의 명제이자 열병입니다.
열정이란 솔직히 언젠가는 식을 날이 있다는 함의가 아닐까요? 다만 사랑의 비동시성 때문에 똑같이 사랑하고, 환멸하고, 똑같이 달아올랐다가, 식어지기가 어려울 뿐이지요. 어쩌면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생물학적 욕구에 더 가까운 것일 수도 있지요. 뇌구조의 차이로 인한 사랑의 생물학적 방식의 차이. 사랑을 하면 세상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뇌의 회로가 달라진 것이며, 마찬가지로 사랑이 변했다면, 그건 뇌 반응의 변화일 테니까요.
아무튼 시인은 일체 인연이라 생각하고 내민 손 따라 기꺼이 줄을 탑니다. 고기를 잡던 그물을 내던지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베드로처럼 군소리 없이 그 손에 이끌려가겠다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기쁜 마음으로 웃음 잃지 않고 가겠다합니다. 이런 의존과 갈망과 맹목은 중독의 징후로 보입니다만 시인은 그걸 열정이라고 하네요. 과연 이 낭만적 황홀경은 공상인가요, 몽상인가요? 가정법일까요, 현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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