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사람의 일 / 천양희

모든 2 2018. 5. 19. 15:37

 

사람의 일 / 천양희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말 드라마는 온통 사랑과 증오, 사랑과 질투, 사랑과 전쟁, 사랑과 이별로 도배되었다.  

사랑과 아스피린, 사랑과 비아그라, 사랑과 찹스테이크, 사랑과 다크쵸클릿, 그리고 사랑과

자본주의. 50년 가까이 된 '태양은 가득히'의 아랑드롱이 '비포어선라이즈'의 에단호크로

모습을 살짝 바꾸어 나타나는가하면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지는' 다른 님의 침묵을 흉내 내기도 한다.

 

'달콤한 인생' 이라기보다 '달콤한 자본주의'란 제목을 택했어야 옳았다. 인물들의 하는 짓

거리들이 모두 가엽고 쓸쓸하지만 동정이 가지는 않는다. 정보석과 오연수의 관계를 보면서

공지영의 어느 소설 속 이야기가 생각난다. 먼저 상대방이 싫어진 사람이 아직 상대방이

싫어지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갖는다는 것. 이를테면 룰을 지킨 사람이 궁지

에 몰려 벌을 받는 유일한 게임이란 것. 뒤죽박죽의 가혹한 크라잉 게임을 이 드라마는

대책 없이 내보내고 있다. 

 

  골디혼과 다이안키튼의 재치 있고 얌전한 복수는 아니다. '조강지처클럽' 은 차라리 '몬테크

리스트 백작'풍의 치밀한 복수였다면 더 좋았겠다. 갈라진 여성의 정신적 자립도 위태롭기

그지없고, 실컷 두들겨 패준다는 것이 고작 영계 남성의 등장이다. 무대 위 과잉 연기를 

보듯 한 연기자의 몸 개그는 다만 시청자를 위한 서비스였을 뿐이다. 확실히 진지하든지,

확실히 천박하든지 했어야 옳았을 이 드라마에 적지 않은 시청자의 눈을 붙들어 맨 것은

그만큼 세상은 심심하고, 그 심심한 세상에서의 '사람의 일'이란 모든 상상과 생각과 행동과

보기가 가능한 '사람의 일'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가 없다. 어제의 그 사람이 오늘의 그 사람이 아니며, 어제 나와 함께

지내던 사람이 오늘 나와 함께 지낼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뒤집어 봐도 마찬가지다. 변한

것은 그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분명히 나로 인해 생각이 바뀐 것이고, 나로 인해 끊임없이

변했던 것이다. 내가 썩어가는 냄새를 나는 맡지 못하고 그가 먼저 맡아버린 거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친다.' 그래서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진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말하나 마나 평생이다.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하게‘ 평생을 살아야 한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

한 쪽을 얻으려 씨앗 하나 심었다 해도 그 모종의 마음 다 비워내지 못하면 그 마음 다

얻기 전에 허허롭고 부질없고 쓸쓸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

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리며' 그 하루에 갇힌다.

 

  다시 살며시 씨앗을 받아내고, 계절 내내 가슴에 품고, 어두운 길을 눈감고 걸어간다.

가다가 사람의 돌쩌귀에 걸려 넘어지고 사람의 나무에 기대기도 하다가 바람이 불면 사람의

풀밭에 쉬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그 돌쩌귀이다가 풀잎이 되었다가 나무가 되기도 한다.

누가 누구의 돌쩌귀였는지 풀잎인지 나무인지는 묻지 말고 다만 사람의 일이라고만 하자. 하지만

만나는 일을 두려워하지는 말자.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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