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모든 2 2018. 5. 19. 15:24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한국 근대문학사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우리는 흔히 김소월과 박목월을 꼽으며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 이란 식으로 말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소월의 자리엔 같은 고향사람인 백석을 올려놓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남측에도 목월 보다는 미당 정도는 되어야 격이 맞을 듯 싶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무렵 해금된 시인 백석에 대한 평론가들의 찬사는 가히 최상급이다. '가장 한국적인 시'(유종호) '한국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김현) '우리 문학의 북극성'(김윤식) 등등등. 또한 백석의 첫시집 ‘사슴’을 한국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집으로 간주한다. 문학에 신드럼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일도 극히 이례적인데 그것도 독자가 아닌 문인과 평론가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니 그동안 백석이란 존재 조차 낯설었던 구시대 독자들은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이다.
 
 이 시는 얼른 들으면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가만 입으로 되뇌어보면 좀 묘한 시적 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이 시에는 제목이 없고 이 시를 발표할 때 편지 겉봉에 있는 주소를 제목으로 삼았다고 한다. '남신의주'와 '유동'은 각각 지명일 뿐이고 '박시봉'은 사람 이름이며, '방'은 예전에 편지 쓸 때 아무개집에 세들어 살면 주인 아무개 '방'이라고 흔히 붙이는 명사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남신의주 유동에 사는 박시봉 씨네 집"이란 뜻의 주소다. 그리고 이 시는 그의 절친한 친구가 소장하고 있다가 1948년에 발표된 해방공간에서의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시의 내용을 봐서 박시봉이라는 사람은 목수인 듯하며 시적 화자(백석)는 가족과 떨어져 홀로 객지에 나와 박시봉이란 목수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자신의 지난 삶을 반추하며 자신의 근황과 심정을 마치 편지 쓰듯 적어내려 가고 있다. 그렇다면 제법 슬술 읽혀져야 하는데 읽기가 그리 녹록지 않다.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관서지방 방언은 그렇다 치고, 일부러 맞춤법을 어긴 듯한 표현과 생경한 조어도 보인다. 김춘수 시인의 지적대로 백석의 시는 '번역이 불가능한 시'요 '토속을 위한 토속의 시'라서 그런건가.
 
  일제 강점기 아름다운 평안도 방언을 제대로 지켜냈다는 칭송에도 불구하고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 혹은 토속 시어의 마력에 무작정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없지않다. 시어가 아무리 눈부셔도 오문(誤文)과 비문(非文)의 허물까지 덮어주지는 못한다면서 백석과 동시대 시인인 오장환이 일찍이 백석을 '스타일만을 찾는 모더니스트'로 규정했음을 기억해 본다. 그러나 백석이 사용한 평북 방언들은 그 의미를 헤아리기 쉽지않지만 왠지 정겹게 다가오는걸 어쩌랴. 백석의 시가 오랜 단절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받는 것은 이처럼 풍부한 우리 방언을 시어로 적절히 승화시켜 언어의 정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백석 시의 토속어와 방언들을 복원하는 것이야 말로 남북의 언어분단을 극복하고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시인의 삶의 자세가 투영된 마지막 행의 '갈매나무'가 구체적으로 어떤 수종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인의 고결한 정신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고, 그 나무처럼 고향 땅에 뿌리박은 채 남쪽을 기웃 거리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버티면서 모든 것을 수용하고 견뎌내는 삶을 살다가 1995년 83세로 생을 마감한 것을 보면 예사로운 각오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시의 첫 부분에 나오는 그 ‘아내’가  바로 나라면서 나타난 백석의 여인이 요정 대원각의 여주인이었던 김자야였다. <내 사랑 백석>이란 회고록을 냈고, 그가 낸 기금으로 1999년 백석문학상이 제정 되기도 하였는데 정말로 그 아내가 '자야'였는지는 확인한 바 없다. 아무튼 96년 전인 1912년 7월 1일 태어난 시인 백석이 오늘날의 미적 기준으로 읽혀도 손색이 없고, 특유의 서술형 종결어미가 지금까지 시의 한 정석처럼 유행하는 걸 보면 그 공감의 영역은 생각보다도 훨씬 넓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