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모든 2 2018. 5. 19. 15:05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 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광주문예회관 원형무대 앞에는 고정희 시인의 시비 <상한 영혼을 위하여>가 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거리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로 시작해서,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라고 다독인 다음,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그렇게 마무리 하고있다

 검은 돌에 하얀 글씨로 또박또박 각인된 이 시가 어느 상심한 40대 실직자에게 읽혀져 그래서 희망을 꺾지않았다면 그 사람에게 고정희 시인은 살아있는 우리보다 낫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슬픔의 강을 헤매고 있었을 그 실직자의 가슴에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는 말로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고정희는 참으로 힘있는 사람이다.

 '해남의 딸' '광주의 언니' 고정희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꼭 17년이 된다. 1991년 6월 9일 장마 속에서 지리산 등반을 하다 피아골의 급류에 휩싸여 43살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해마다 이맘때면 그녀의 생가가 있는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는 <고정희 기념관>을 보려는 독자들과 문학지망생, 뒷산에 자리한 묘에 국화 한송이 바치려는 그녀의 친구들로 분주할 것이다. 짧았던 고정희의 삶이 치열했던 만큼 사후 그녀에 대한 관심도 깊다.

 고정희는 정말 시인다운 시인이었다. 넉넉지 못한 집안형편 때문에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마치고 1975년 27살에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면서 박남수 시인의 추천을 받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고 1983년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라도의 질펀한 황토흙에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같은 역사적 물줄기를 닮기도 하고 사랑,눈물,삶 같은 잔잔한 감동도 담아냈다.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후에 미발표 시를 모아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이란 유고시집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고정희는 시인으로만 한정하여 각인되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이다. '시인'이라는 푯말에 가려진 고정희의 다른 업적, 여성운동가로서의 업적이 너무 크다. 여성해방문학의 선구자였고 한국여성 삶의 질 향상에 평생을 걸었다. 광주에 있을때는 YMCA 간사로 시민운동에 참여했고, 서울로 간뒤 가정법률상담소 간사, 여성신문 주간, '또 하나의 문화'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여성신학자모임 등을 통해 여성 인권 지키기에 앞장섰다. 현대사에서 그지역이 배출한 인물중 고정희 만한 여성운동가도 없다. 그래서 전라도에서는 김남주와 더불어 고정희는 그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고정희와 같은 여성운동가가 더이상 목청 높일 필요가 없는 세상을 꿈꾼다. 늘 전투적 긴장에 감성이 쌓여있는 여성을 원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남자를 가진 여자. 그런 네가 그리우면 울기도 하는 여자. 그래서 향기와 온기를 더 많이 가슴에 간직한 여자가 수북한 세상을 꿈꾼다.

 

 그렇다해도 아직까지는 고정희의 지성을 대물림받아 싸워야하는 상황임에는 틀림없는가 보다. 서울시청앞 광장에 촛불을 들고 모여든 그 많은 여인들을 볼라치면 여전히 그대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밤'은 계속되고,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린' 날들의 연속이다. '네가 그리우면' 울고있을 고정희 시혼의 힘은 오늘도 그것을 힘껏 떠받치고 있다. 

살아있다면 올해 환갑을 맞이할 그녀가 그리우면, 나는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