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경제학/정다혜
시 한 편 순산하려고 온몸 비틀다가
깜박 잊어 삶던 빨래를 까맣게 태워버렸네요
남편의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을
내 시 한 편과 바꿔버렸네요
어떤 시인은 시 한 편으로 문학상을 받고
어떤 시인은 꽤 많은 원고료를 받았다는데
나는 시 써서 벌기는커녕
어림잡아 오만 원 이상을 날려버렸네요
태워버린 것은 빨래뿐만이 아니라
빨래 삶는 대야까지 새까맣게 태워 버려
그걸 닦을 생각에 머릿속이 더 새까맣게 타네요
원고료는 잡지구독으로 대체되는
시인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시의 경제는 언제나 마이너스
오늘은 빨래를 태워버렸지만
다음엔 무얼 태워버릴지
속은 속대로 타는데요
혹시 이 시 수록해주고 원고료 대신
남편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 보내줄
착한 사마리언 어디 없나요
-불교문예 2008 여름호-
1908년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발표를 기점으로 올해가 현대시 100주년이다. 모처럼 신문지면 등을 통해 1%의 시인과 0.1% 정도의 시는 제법 대접을 받은 것 같다. 딱히 경제적 이득이나 존경이 주어져서가 아니라 그냥 시가 소개되는 것으로도 대접받는다고 하는 게 100년 역사를 가진 시인공화국의 알량한 현주소다.
작품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고, 그 감동이 삶을 얼마만큼 더 진지하고 진하게 해주었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시인들은 가슴과 머릿속을 새까맣게 태우면서까지 읽어주는 사람에게 삶의 곡절을, 사물이 전하는 말을, 잃어버리고 묻힌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나눠 갖고 싶은 것이다. 그냥 읽어주기만 해도 고맙다고 넙죽 절하는 것이다.
아무리 시 쓰다 날려버린 재물을 벌충할 요량이긴 하나 정다혜 시인의 희망사항 목록 전부는 좀 과한 듯 하고 원고료 대신 수건 한 장, 구독료 말고 ‘잘 읽었다’ 한 마디면 일단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고 남는다 생각하는 게 시인인데, 이만하면 조롱의 칭호이거나 말거나 ‘성자’라 불러주어도 무방하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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