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67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 . 6 / 김용락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 . 6 / 김용락 가만히 생각해보니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반달]의 윤석중 옹이 여든의 노구를 이끌고 새싹문학상을 주시겠다고 안동 조탑리 권정생 선생 댁을 방문했다 수녀님 몇 분과 함께, 두 평 좁은 방 안에서 상패와 상금을 권 선생께 전달하셨다 상패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권 선생님 왈 "아이고 선생님요, 뭐 하려고 이 먼 데까지 오셨니껴?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한 게 뭐 있다고 이런 상을 만들어 어른들끼리 주고 받니껴? 내사 이 상 안 받을라니더......" 윤석중 선생과 수녀님들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서울로 되돌아갔다 다음날 이른 오전 안동시 일직면 우체국 소인이 찍힌 소포로 상패와 상금을 원래 주인에게 부쳤다 그 사실을 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 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광주문예회관 원형무대 앞에는 고정희 시인의 시비 가 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거리니/ 뿌..

달팽이 약전略傳 / 서정춘

달팽이 약전略傳 / 서정춘 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이는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 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생生이 있었다 - 시집『귀』(시와시학사, 2005) 연체동물인 달팽이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집을 소유한 거의 유일한 종이며, 그 나선형의 집은 마치 팽이를 엎어놓은 것 같다. 그러나 난생이며, 암수 한 몸인데다가 두 더듬이와 눈을 가진 이 끈끈한 놈의 본디 고향은 바다이다. 5억 7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에 바다에서 살다가 해수면이 낮아짐에 따라 어쩔 도리 없이 육지로 그 서식지를 이동하였다. 달팽이에게 있어서 집은 수분 유지와 신체 보호를 위한 수단이지만 서정춘 시인은 이 짤막한 한 문장의 시에서 몸속의 '뼈란 뼈 죄다 녹..

봄, 모종 / 진란

봄, 모종 / 진란 갔다, 그는 오고싶으면 왔다가 금새 가버린다. 하고싶은 말이 하도 많아 전화기를 들었다놨다 눈 앞에서는 속내 드러날까 눈길을 피하는데 왜 또 무슨 상상을 하길래 그러냐고 오히려 핀잔을 튕기는구나 새로 옮긴 그 땅에서 뿌리를 내리느라 나름 애간장 조이며 사는 것이더냐고 바람만 건듯 불어도 밤새 뜬눈으로 지새는걸 네게로 가는 신호음은 부재중이고 잔뜩 부은 눈두덩이에 실핏줄 선 마음을 넌 그래, 너도 더 살아보아라 꼭 요담에 너만큼만 길러보아라 봄바람에 가방도 잃고 술에 쓰러져잤다는 말 네가 간, 그림자 뒤에 오금오금 파고드는 진자리 속곳까지 젖어버리는 빗물에 봄은 피어나겠지 환한 햇살에 마른 자리 버석거리는 실어의 흙두엄, 그 봄빛 속에 너는 오고싶으면 왔다가 가버리는 짤막한 해후, 그 ..

바람의 말 / 마종기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시집 가지 떠난 마른 잎들이 허공의 빈 곳을 두리번거릴 때 쯤에야 비로소 나는 외로운 척 할 것이다. 그대 부정맥을 앓고있는 종아리 사이로 노란 모래 바람이 지나갈 때에도 나는 외롭지 않았다. 연립..

꽃씨를 품은 서랍/ 박동덕

꽃씨를 품은 서랍/ 박동덕 농기구 창고에 턱 버티고 앉은 헌 책상서랍 입이 무겁다 내가 먼저 열지않으면 -- 자로 다문 입 절대 열지않는다. 눈치도 없이 자리나 차지하는 미련퉁이 서랍을 뜯어내어 개집을 만들까 날도 추운데 확 군불이나 지펴버릴까 중얼거리며 바깥으로 끌어내려 하자 말에도 씨가 있다며 무뚝뚝한 사내 입을 열었다 종알종알 지끌이던 말이 씨가 되어 후회해본 일 한두번이겠냐고 지난 해 모아두었던 꽃씨를 탁 뱉어낸다 오래삭힌 말에는 기다림의 미학이 숨어있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저 입은 세상을 지키는 힘이다 시골에 살고 싶다는 말이 씨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붙박은 이 집까지 따라온 저 책상 서랍은 씨앗을 쓸어 담으며 꽃 피우고 싶다 말하고는 입을 꾹 다문다 처마밑에서 웅성거리던 겨울 바람 슬거머..

어머니께 드리는 노래 / 이해인

어머니께 드리는 노래 / 이해인 어디에 계시든지 사랑으로 흘러 우리에겐 고향의 강이 되는 푸른 어머니 제 앞길만 가리며 바삐 사는 자식들에게 더러는 잊혀지면서도 보이지 않게 함께 있는 바람처럼 끝없는 용서로 우리를 감싸 안은 어머니 당신의 고통 속에 생명을 받아 이만큼 자라 온 날들을 깊이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기쁨보다는 근심이 만남보다는 이별이 더 많은 어머니의 언덕길에선 하얗게 머리 푼 억새풀처럼 흔들리는 슬픔도 모두 기도가 됩니다 삶이 고단하고 괴로울 때 눈물 속에서 불러 보는 가장 따뜻한 이름, 어머니 집은 있어도 사랑이 없어 울고 있는 이 시대의 방황하는 자식들에게 영원한 그리움으로 다시 오십시오, 어머니 아름답게 열려 있는 사랑을 하고 싶지만 번번히 실패했던 어제의 기..

산에서 헌법 제12조를 읽다 / 박칠근

산에서 헌법 제12조를 읽다 / 박칠근 산에선 뒤엉킨 갈등조차 헌법 제12조처럼 술술 풀린다 나지막한 풀 한 포기도 키 큰 나무와 조화를 이루고 동떨어져 무관할 것 같은 먼 산도 어울려서 말쑥한 풍경이 된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도 헌법 제12조처럼 제 몫을 다 하는 큰 바위 홀로 서 있어도 소외되지 않는 소나무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이들을 수색 또는 심문할 수 없노라 능선 타며 흐르는 야릇한 빛 나는 비로소 신체의 자유를 느낀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여 휴식을 미룬 채 나를 바라보는 오리숲이여 내 어찌하여 오늘 하루도 옹졸하고 쪼잘하게 내 것을 베풀지 못하고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행복을 탐했던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이 흘러간다 저토록 탐스러운 절경을 남긴 채, 헌법 제12조처럼. 200..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 시집『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중에서 -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를 나도 보았습니다. 민들레와 괭이밥도 보았습니다. 어쩌다 대구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 쯤 나도 보았던 기억을 갖고 있고요.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 또한 내가 늘 보는 풍경 목록 가운데 하나입니다. 약간 ..

반성 704/ 김영승

반성 704/ 김영승 밍키가 아프다네 마리 새끼가 하도 젖을 파먹어서 그런지눈엔 눈물이 흐르고까만 코가 푸석푸석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닭집에 가서 닭 내장을 얻어다 끓여도 주어보고생선가게 아줌마한테 생선 대가리를 얻어다 끓여 줘 봐도며칠째 잘 안 먹는다부억 바닥을 기어다니며여기저기 똥을 싸 놓은 강아지들을 보면낑낑낑 밍키를 보며 칭얼대는네마리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나는 꼭 밍키의 남편 같다. - 시집 『반성』(민음사, 2007개정판) 몇 해전 매일신문에 흥미있는, 그러나 재미로만 볼 수 없는 짠한 사진 다섯 장이 나란히 실렸다. 한 무리의 개들이 대구 달성군의 어느 마을 앞길을 건너다 한 마리가 화물차에 치였다. 뒤따르던 다른 개들이 흔들어 깨워 보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개는 화가 치민 듯 지나는 차에 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