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별 / 류시화 벌레의 별 / 류시화 사람들이 방안에 모여 별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문 밖으로 나와서 풀줄기를 흔들며 지나가는 벌레 한 마리를 구경했다 까만 벌레의 눈에 별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는 벌레를 방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어느새 별들은 사..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5.12
그 여자, 기왓장 같은 여자/ 이은봉 그 여자, 기왓장 같은 여자/ 이은봉 두부두루치기 백반을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다. 리어카에서 파는 헐값의 검정 비닐구두 잘도 어울리던, 반주로 마신 몇 잔의 소주에도 쉽게 취하던, 마침내 암소를 끌고 가 썩은 사과를 바꿔 와도 좋다던, 맨몸으로도 좋다던 여자가 있었다. 한때는 자랑..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5.12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5.12
가을의 소원 / 이시영 가을의 소원 / 이시영 내 나이 마흔일곱, 나 앞으로 무슨 큰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진즉 그것을 알았어야지!) 틈나면(실업자라면 더욱 좋고) 남원에서 곡성 거쳐 구례 가는 섬진강 길을 머리 위의 굵은 밀잠자리떼 동무 삼아 터덜터덜 걷다가 거기 압록 지나 강변횟집에 들러 아직도 곰의..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5.12
소주 / 최영철 소주 / 최영철 나는 어느새 이슬처럼 차고 뜨거운 쟝르에 있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 아니다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이 있다 지금 웅덩이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가 차고 뜨거운 것을 감싼다 어디 불같은 바람만으로 되는 것이냐고 함부로 내지를 토악질로 여기까지 보려고..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5.12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 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시집 '이 時代의 사랑' 가운데 - 개 같은 가을이라니. 참 죽여주는 가을보다 더 도발적인 직유다.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는 시인이..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5.12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구나 그대와 나 돌아갈 길 가늠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구나 구두는 낡고, 차는 끊겨버렸다. 그대 옷자락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데 나는 무책임하게 바라본다, 그대 눈동자만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5.12
잊자/ 장석주 잊자/ 장석주 그대 아직 누군가 그리워하고 있다면 그대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대 아직 누군가 죽도록 미워하고 있다면 그대 인생이 꼭 헛되지만 은 않았음을 위안으로 삼아야 한다 그대 아직 누군가 잊지 못해 부치지 못한 편지 위에 눈물 떨구고 있다면 그대 인생엔 여전히 희망이 있다 ..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5.12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년, 문학동네>중에서 - 지금은 사용하는 사람이 예전처럼 많지는 않아 흔하게 보진 못하지만 불붙은 연탄 한 장으로 뜨끈한 아랫목이 그리워지는 ..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5.12
다 스쳐보낸 뒤에야 사랑은 / 복효근 다 스쳐보낸 뒤에야 사랑은 / 복효근 세상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산길에선 정말 믿을 사람 하나 없다 정상이 어디냐 물으면 열이면 열 조그만 가면 된단다 안녕하세요 수인사하지만 이 험한 산길에서 나는 안녕하지 못하다 반갑다 말하면서 이내 스쳐가버리는 산길에선 믿을 사람 없다 ..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018.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