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잊자/ 장석주

모든 2 2018. 5. 12. 11:33





잊자/ 장석주

 
그대 아직 누군가 그리워하고 있다면
그대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대 아직 누군가 죽도록 미워하고 있다면
그대 인생이 꼭 헛되지만 은 않았음을
위안으로 삼아야 한다

 

그대 아직 누군가 잊지 못해
부치지 못한 편지 위에 눈물 떨구고 있다면
그대 인생엔 여전히 희망이 있다

 

이제 먼저 해야 할 일은
잊는 것이다

 

그리워하는 그 이름을
미워하는 그 얼굴을
잊지 못하는 그 사람을
모두 잊고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다

 

잊음으로써 그대를
그리움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잊음으로써 악연의 매듭을
끊고 잊음으로써 그대의 사랑을
완성해야 한다

 

그 다음엔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 시집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중에서 -



 

 인간은 잊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그때 그 순간에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감정도 한순간만 지나가면 사라지고 현실이라는 중화제 앞에서 그저 흐릿해진다. 그러나 또 누군가는 ‘기억하라’고 말한다. 시인의 경우 기억이란 자재창고와도 같아서 시를 쓸 때 투입된 재료들은 기억된 빛과 그림자와 함께 그 시대의 정신 위에서 빚어진다.

 

 하지만 시인은 부질없는 그리움으로 번민하는 자에게 조용히 다가가 '잊자'고 권유한다. 잊어야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회유한다. 나중에는 구호를 반복하며 '다시'를 외친다. 누가 보아도 그것은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스스로에 대한 설득임을 눈치 챌 수 있다.

 

 눈 붉히며 잠 못 이룬 그날의 짧았던 밤도, 애가 닳도록 만남을 비껴갔던 우리의 운명도, 그 사랑의 약속도, 이제는 모두 잊어야겠지. 무심한 세월의 그림자 길게 드리울 때 마다 아, 이제 다시는 널 기억하지 않으리. 아파하지 않으리.

 

 그러나 삶이란 끊임없이 기억해야할 것과 잊어버려서 좋을 것들 사이에 스스로 지리멸렬해지고 혼돈에 빠진다. 우리는 해가 바뀐 지금도 자주 기억해야할 것들과 잊어버려야할 것 들 사이에서 아파한다. 그래서 얼마나 더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며 스스로 다짐해야할지, 다시 시작해야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