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모든 2 2018. 5. 12. 11:57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 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시집 '이 時代의 사랑' 가운데 -

 

 

 

 개 같은 가을이라니. 참 죽여주는 가을보다 더 도발적인 직유다.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는 시인이라 그런지 지독한 절망의 끝에서 본 가을이 신선하다. 저 산의 건조와 바람의 우울, 낙엽의 조락처럼 쓸쓸한 풍경들이 이유 없는 고통으로 체험될 때 가을은 더 이상 아름다움으로 칭송되지 않는다. 깡마른 풍경으로 사물들은 방치되고 몸과 마음의 운신 또한 덩달아 힘겹다. 누구도 연결해내지 못하는 언어만이 꿈과 현실에서 떠나간 애인들을 기억할 뿐.

 

 ‘말 오줌 냄새’를 풍기며 폐수로 고이는 가을이라는 막다른 현실. 그 끝에서 황혼을 업은 강물이 마비된 한쪽 다리로 찾아가는 바다에서 저를 죽이고 말 것을 믿으므로 더없이 충만한 고통 속에서 묻는다. 여기가 어디냐고. 언제쯤 이 불구의 마음과 지류의 삶이 무한의 바다에서 죽음처럼 고요해질 수 있느냐고. 마음에 추를 달아 끝없이 추락케 하는 개 같은 가을에 우리는 모두 무엇이냐고. 참을 수 없는 아픔이 구차하게 번져가는 '매독 같은 가을' 이 저주의 가을에 한달음으로 달려가 그 풍경 다 받아내지 못하는 나는 도대체 뭐냐고.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의 소원 / 이시영  (0) 2018.05.12
소주 / 최영철   (0) 2018.05.12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0) 2018.05.12
잊자/ 장석주  (0) 2018.05.12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0) 2018.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