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 최영철
나는 어느새 이슬처럼 차고 뜨거운 쟝르에 있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 아니다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이 있다
지금 웅덩이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가
차고 뜨거운 것을 감싼다
어디 불같은 바람만으로 되는 것이냐고
함부로 내지를 토악질로 여기까지 보려고
차가운 것을 버리고, 뜨거운 것을 버렸다
물방울 하나 남아 속살 환희 비친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은 아니다
불순의 시간을 견딘 폐허같은 주름이 있다
오래 곰삭아 쉽게 불그레진 청춘이
남은 저를 다 마셔달라고 기다린다
최영철 시인은 오래전 시하늘 시낭송회에 한번 초대받은 바 있다. 눈에 보이는 사물 하나하나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솜씨에 탄복했던 기억이 새롭다. 때로는 의료용 고무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또 때로는 손바닥면에 붉은고무를 칠한 목장갑을 끼고 능숙하게 해체된 물건 그 틈바구니에 그만의 언어를 쏙쏙 밀어 넣어가며 새롭게 구축한 사물의 이미지가 마치 색다른 언어 조형예술을 보는 듯 하다.
그의 시 '연장론'에서 처럼 '몽키스패너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이스플라이어의 꽉 다문 입술로 오밀조밀하게 도사린 내부를 더듬으며' 우리 가까이에서 수시로 영혼을 분탕질 해대는 소주를 원심분리하였다.
소주 한잔에 담긴 추억으로부터 자기반성과 갱신의 의지로 나아가며 긴장을 획득하는 최영철 시의 내력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과 불순의 시간을 견딘 폐허같은 주름 당시의 현실대응이 현재의 자아관점에서는 차갑고 뜨거운 모든 것을 버렸다 했지만.
그러나 미처 다버리지 못해 남겨진 그 투명한 것은 저를 다 마셔달라고 기다린다. 시인은 아직도 80년대의 사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소주로 시대의 아픔을 다 이겨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오늘도 공영방송에서는 100분토론이 벌어지고 시사토크쇼가 진행된다. 그리고 도처에서 묵은 쟝르의 소주판이 펼쳐지고 잔은 말갛게 비워지고 있다. 미합중국 대통령 조지부시도 카트리나와 이라크전으로 끊었던 술을 다시 마셨다. 또 건수가 있는 금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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