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소원 / 이시영
내 나이 마흔일곱,
나 앞으로 무슨 큰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진즉 그것을 알았어야지!)
틈나면(실업자라면 더욱 좋고)
남원에서 곡성 거쳐 구례 가는 섬진강 길을
머리 위의 굵은 밀잠자리떼 동무 삼아 터덜터덜 걷다가
거기 압록 지나 강변횟집에 들러 아직도 곰의 손발을 지닌
곰금주의 두툼한 어깨를 툭 치며
맑디맑은 공기 속에서 소처럼 한번 씨익 웃어보는 일!
신경림 시인의 시에서처럼 가을엔 어디를 가다 이쯤에서 길을 탁 잃어버리고 마냥 떠돌이가 되어 한 열흘 아무렇게나 쏘다니다 왔으면 좋겠다. 어정쩡한 실업자의 신분과 후줄구레한 꼬락서니가 더욱 편할지도 모르겠다.
'남원에서 곡성 거쳐 구례 가는 섬진강 길'따라 가다 압록 다리께 식당에 들어 다슬기 수제비 한 그릇 사먹을 돈에다가 걷다 기어이 다리 곤해지면 아무렇게나 시골버스 잡아탈 노잣돈이나 쑤셔 넣으면 그만이겠다.
산길을 걷다 가지가 많이 뻗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가다가다 물빛이 반짝이는 곳 엉덩이 얹기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아 조각구름을 보다 마침 된장잠자리가 북상하는 길을 따라 함께 매진한들 어떠랴.
길을 잃고 다시 사람 그리운 세상의 물가 어디쯤 오대천 골지천 몸을 섞는 아우라지 나루터에나 가볼까. 오십 중턱 노을빛이 흔들리는 철든 바닷가 모래 위에 벌렁 드러누워 어린 꿈을 꿀까.
나 마찬가지로 앞으로 무슨 큰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돌아오는 길 우포늪을 지나 고령 땅을 거쳐 화원쯤에 당도하면 맑은 공기 다 뱉어내고 사는 일이 막막한 그 까닭 다 묻지 않은 채 나도 소처럼 한번 씩 웃어보는 일, 그것 이 가을의 소원이라고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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