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67

따뜻한 소음 / 전향

따뜻한 소음 / 전향 잘 나가는 대기업에 근무하다 40대 초반에 명퇴하고는 고향에 내려와 살고 있는 그, 처자식 모두 서울에 두고 홀로 쇠약한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의 집을 찾아가 문을 여는데 삐거덕거리는 요란한 소리에 '문에 기름 좀 쳐야겠어요' 하니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은 아들 기다리다 그 소리에 들어왔구나 하고 마음 놓으실 텐데 그러면 되겠느냐'고 한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따뜻하게 이어주는 문소리가 넓고 깊은 강물로 흐르는 그 집에서 기름 쳐야겠다는 내 말이 차가운 소음이 되어 되돌아왔다 소음은 소리를 말하되 시끄럽고 불쾌한 부정의 소리를 일컫는 낱말이다. 이것 때문에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이웃간에 소송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소리가 소음이고, 같은 종류의 소리라 ..

기차는 간다 / 허수경

기차는 간다 / 허수경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 시집 가운데 지금도 서울역 앞에는 떠나고 오지않은 그리움을 기다리며 출구 앞을 서성이는 여인이 있다. 오래전 먼 곳으로 날라간 사람이 오늘 올지도 몰라 매일 꽃가루를 만지작거리는 공항의 여인도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 꽃을 꽂은 채 도로 중앙분리대를 줄타기하듯 연분홍치마자락 치켜올리며 걷는 여인네도 있었을거라. 그들의 의상은 계절과는 관계없이 한결같았고, 얼굴색은 붉었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정거장에서 자의든 타의든, 혹은 자의반 타의 반이든 사람을 떠나보내고 그리움의..

해바라기 / 원무현

해바라기 / 원무현 아버지 뽕밭에 묻어야 했던 날 나와 어린 동생은 장맛비 속에 하염없이 고개를 꺾었지요 바람 앞에 촛불처럼 겨우 붙어 있던 목 추스르신 어머니 아픈 목을 쓸어안으며 팍팍한 세상 잘 떠났지 뭐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고 산사람은 살아야지 팽! 코를 푸실 때 쪼개진 구름 사이에서 색종이 같은 햇살이 쏟아져 내렸지요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얘들아 해바라기 같은 내 새끼들아 고개 빳빳이 세우고 저기 저기 해 좀 보아 아무리 보아도 어머니 어머니 눈엔 아버지 얼굴만 떠있었는데요 - 시집가운데 우리같은 아마추어 시인의 시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가 자꾸 설명하고 싶어 한다는 거다. 자기 스스로 시의 설계도를 깔끔하게 그려낼 재간이 부족한 탓도 있겠으며, 독자들의 ..

벗에게 부탁함 / 정호승

벗에게 부탁함 / 정호승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 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 시집 (1999,창작과비평) 욕을 얻어먹고서도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다. 욕이 배따고 들어 오냐며 애써 태연한 척 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상은 그만큼 더 통증이 깊다는 뜻의 다름 아니다. 악의 없이 좋은 뜻으로 한 말도 곡해하면 듣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욕이야 더 말해 무엇 하리. 그런데 들어서 기분 좋은 욕은 없을까? 아니 좋을 것 까지는 아니라 해도 태연히 듣고 넘길 욕은 없는 걸까. 대구 ..

골프군 러브호텔면 가든리의 화훼농 김씨의 꿈/ 고재종

골프군 러브호텔면 가든리의 화훼농 김씨의 꿈/ 고재종 그래! 나도 이참에 꽃농사 거두면 아반떼 하나 뽑겠다던, 그 차에 읍내 태양다방 화자년 태우고 한바탕 씽씽 밟겠다던, 나라고 맨날 일로만 살 수 있겠느냐던 화훼농 김씨의 꿈, 그가 키운 장미처럼 붉었지. 아무렴! 그렇게 달려서, 뭐 도회놈들만 줄창 가는 게 아닌 가든집에도 가겠다던, 가서 갈비도 굽고 포커도 치겠다던, 사람일 모르는데 언제까지 이럴 순 없잖느냐던 화훼농 김씨의 꿈, 그가 키운 백합처럼 환했지. 그래그래! 그러곤 샛강변 러브호텔로 직행하겠다던, 그 쌩통같은 화자년 팍팍 죽여주겠다던, 가능하면 그 누구라도 구워삶아서, 국민 스포츠의 하나인 골프도 배워야겠다던 화훼농 김씨의 꿈, 그의 하우스 안의 황국처럼 부풀었는데, 그랬는데, 아뿔사! 이..

그는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 / 김기택

그는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 김기택 날개 없이도 그는 항상 하늘에 떠 있고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를 나설 때 잠시 땅을 밟을 기회가 있었으나 서너 걸음 밟기도 전에 자가용 문이 열리자 그는 고층에서 떨어진 공처럼 튀어 들어간다. 휠체어에 탄 사람처럼 그는 다리 대신 엉덩이로 다닌다. 발 대신 바퀴가 땅을 밟는다. 그의 몸무게는 고무타이어를 통해 땅으로 전달된다. 몸무게는 빠르게 구르다 먼지처럼 흩어진다. 차에서 내려 사무실로 가기 전에 잠시 땅을 밟을 시간이 있었으나 서너 걸음 떼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는 새처럼 날아들어 공중으로 솟구친다. 그는 온종일 현기증도 없이 20층의 하늘에 떠 있다. 전화와 이메일로 쉴 새 없이 지저귀느라 한 순간도 땅에 내려앉..

목련/ 류시화

목련/ 류시화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목련이 필 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예쁘게만 살려고 하는 여자들에게서 우린 흔히 "나는 60까지만 살래. 더 늙어지면 추할 거 같아..."란 소리를 듣는다...

큰 그릇 - 바다 11 / 최동룡

큰 그릇-바다11 / 최동룡 자정(自淨)의 이마를 바윗돌에 간다 흰 피를 다스려 맑아지는 물그릇을 본다 철썩! 따귀를 맞는다 내가 시퍼렇게 정신이 든다 - 시집 중에서 - 해안선에 서서 내 쪽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는 감상과 바다 한가운데 섬에서 바위를 때리는 파도를 볼 때의 느낌은 같지 않으리라. 그것도 바위 가장자리에서 파도의 물보라가 사정없이 뺨을 건드리고 덩어리째 산소를 들이킬 때 '맑아진다'라거나 '정신이 든다'란 시어는 오히려 지극히 직설적이다. 큰 그릇의 상대어는 작은 그릇이겠지만 '찻잔 속의 파도'란 말과 함께 얼른 찻잔을 연상한다. 그래서 당연히 큰 그릇의 파도는 그 '찻잔 속의 파도'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스스로 이마를 바윗돌에 부딪치며, 철철 넘치는 흰 피 다스려 스스로를 정화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로 문드러진 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기다려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것이 아닌지 몰라 열 개나 되는 발가락으로 열 개나 되는 손가락으로 날뛰고 허우적거리다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눈물로 눈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