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기차는 간다 / 허수경

모든 2 2018. 5. 19. 14:23

 

기차는 간다 / 허수경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 지성사>가운데

 

 

 지금도 서울역 앞에는 떠나고 오지않은 그리움을 기다리며 출구 앞을 서성이는 여인이 있다. 오래전 먼 곳으로 날라간 사람이 오늘 올지도 몰라 매일 꽃가루를 만지작거리는 공항의 여인도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 꽃을 꽂은 채 도로 중앙분리대를 줄타기하듯 연분홍치마자락 치켜올리며 걷는 여인네도 있었을거라. 그들의 의상은 계절과는 관계없이 한결같았고, 얼굴색은 붉었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정거장에서 자의든 타의든, 혹은 자의반 타의 반이든 사람을 떠나보내고 그리움의 화석을 하나씩 남긴다. 그 떠남과 기다림의 현장이 역의 플랫홈이든 공항대합실이든 아니면 눈에 보이지않는 마음의 정거장이든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몸이 먼저 닮아있다는 것. 가족이 그렇고 연인이 그러하며 친구 또한 그렇다.  이 시는 '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며 기차와 밤꽃과 밤꽃이 진 꽃자리를 집적된다. 그것들을 소리없이 흔들면서 서로를 끈끈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기차가 지나간 레일 위는 모든' 지나가는 것들' 즉 시간의 다른 이름이 놓여있고, 시인은 그 위로 그 '지나가는 것들'을 보며 밤꽃의 시간을 추억한다. 문득 후룩 흡입된 밤꽃의 정액냄새가 모든 성적 메타포를 지원한다.

 

 기차와 터널(레일)로 상징된 성적 은유는 '그리움'이라는 낱말의 원형적 이미지가 잘 더러나 있다. 따지고보면 모든 그리움은 자신을 향한 것 .그런데 나 아닌 어떤 것이 '나보다 더 그리운 것'이 될 때가 있다면 오직 '사랑할 때' 뿐일 것. 사람은 사랑 속에 있을 때 아주 잠깐 '에고'를 버리고 진정으로 나보다  타인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그것도 '기차가 지나가듯' 아주 잠깐. 플랫홈과 공항의 특별한 여인 몇몇을 제외하면 '결국 남는 것은 나 뿐' 이라는 인식에 대체로 이르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