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에게 부탁함 / 정호승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 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1999,창작과비평)
욕을 얻어먹고서도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다. 욕이 배따고 들어 오냐며 애써 태연한 척 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상은 그만큼 더 통증이 깊다는 뜻의 다름 아니다. 악의 없이 좋은 뜻으로 한 말도 곡해하면 듣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욕이야 더 말해 무엇 하리. 그런데 들어서 기분 좋은 욕은 없을까? 아니 좋을 것 까지는 아니라 해도 태연히 듣고 넘길 욕은 없는 걸까.
대구 북성로 공구골목에 욕쟁이 할머니로 소문난 복어요리집이 있었다. 할머니의 음식은 당연히 맛깔스러웠지만 그보다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는 할머니의 귀에 착 감기는 욕이 무엇보다 일품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단골들은 더 이상 그 욕을 들을 수 없었다. 왠지 쓸쓸하고 허전했다. 그리고 음식 맛이 그다지 변치 않았음에도 단골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 결국 그 복집은 폐업을 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할머니한테 들었던 욕은 욕이 아니라 음식 맛을 돋우는 양념이자 추임새였던 것이다. 그동안 그렇게 욕을 얻어먹으면서 허허 웃으며 식사를 즐겼던 것은 욕쟁이 할머니가 욕을 욕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손님 역시 욕을 욕으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라도 어떤 마음을 담느냐에 따라 듣는 사람의 반응과 미치는 파장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복 지리처럼 맑고 순수한 사람임을 잘 알기에 평소에 들으면 기분 나빴을 수 있는 욕이 전혀 악의 없이 들리면서 오히려 그 욕이 손님과의 친화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욕쟁이 할머니는 부산 서면 뒷골목에도, 전라도 해남에도, 서울 노량진 시장에도 명물처럼 존재해 어쩌면 전략일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기야 김열규 교수는 욕에도 카타르시스의 미학이 있다며, 그 전략과 전술을 논한 바 있지만 그 할매들이 모두 그 논문을 탐독했을 리는 만무하다.
정호승 시인은 욕의 순화나 미학의 차원을 넘어 마조히즘으로 접근하였다. 이 봄의 이름을 빌려 수식하는 욕이라면 얼마든지 마구 퍼부어도 좋다고 한다. '새같은 놈' '나무같은 놈' '봄비같은 놈' '꽃같은 놈' 들어서 기분 좋은 욕이 되고 마는데 결국엔 속내를 드러낸다. 꽃같은 놈이 되고 싶다고. 나의 벗에게도 부탁한다. 혹여 욕을 하려거든 미련 곰탱이같은 놈 대신 '탱자같은 놈'으로, 싸가지없는 놈 대신에 ' 뻐꾸기같은 놈'으로, 지 잘난 맛에 사는 대책 없는 놈 대신에 '소나무같은 놈'으로 가급적 우아하게 고쳐 욕해 주길 바란다.
어느 절집에서 장고방 근처 쓰레기를 몰래 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쓰레기 무단 투기 엄금' 이란 푯말을 세웠는데 효과가 별로없자 문구를 이렇게 바꾸어 달았다. '아니온듯 다녀가시옵소서' 그 후 쓰레기가 줄었는지 어쨌는지는 확인한 바 없지만 얼마나 우아한 완곡인가. 세상의 언어들이 모두 우리 마음 속의 풍금소리처럼 이럴 순 없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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