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해바라기 / 원무현

모든 2 2018. 5. 12. 13:36

 

해바라기 / 원무현

아버지
뽕밭에 묻어야 했던 날
나와 어린 동생은 장맛비 속에
하염없이 고개를 꺾었지요

바람 앞에 촛불처럼 겨우 붙어 있던 목
추스르신 어머니
아픈 목을 쓸어안으며
팍팍한 세상 잘 떠났지 뭐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고
산사람은 살아야지
팽! 코를 푸실 때
쪼개진 구름 사이에서
색종이 같은 햇살이 쏟아져 내렸지요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얘들아 해바라기 같은 내 새끼들아
고개 빳빳이 세우고 저기
저기 해 좀 보아
아무리 보아도 어머니
어머니 눈엔 아버지 얼굴만 떠있었는데요

 

 - 시집<홍어/한국문연.2005>가운데

 

 

 우리같은 아마추어 시인의 시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가 자꾸 설명하고 싶어 한다는 거다. 자기 스스로 시의 설계도를 깔끔하게 그려낼 재간이 부족한 탓도 있겠으며, 독자들의 감상 수준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여 납득과 공감을 얻어려다 그리되는 경우도 있겠다.

 

 물론 '시적 장치'의 지나친 비약 및 함축, 혹은 '시적 상상력'을 핑계삼아 문맥의 부정확을 방기하는 것 역시 초보의 수준이며 문학성과는 거리가 멀다. 대중성 획득을 위해 억지 이미지가 덧쒸워지고, 메시지가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상투적인 산문성 시가 문제되는 것이지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좋은 시의 전범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원무현 시인의 시는 그 전범에 매우 가깝게 읽혀진다. 왜냐하면 우선 그는 좋은 시인이기 때문이다. 원무현 시인의 모든 감각기관과 세포가 일제히 시를 향해 열려있기 때문은 아니다. 시의 언어가 생리적으로 체험이나 사물의 구체를 겨냥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좋은 시인은 그의 내면의 상처를 복기, 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대체로 시인들은 자기의 감성적 상처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그것을 억지로 감춤으로써, 끝내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를 벗지 못하는데 원무현의 시에는 삶과 자신의 체중이 고스란히 실려있다. 함민복의 시도 그러한데 그렇게 읽혀지는 시인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래서 '해바라기'는 시인 자신의 상처와 회상에 머물지 않고 그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똑 같은 정서적 반응으로 자리하게 되는데, 사실은 그의 시집 표제작인 '홍어'가 농도는 더 짙은 편이다. 한 편의 시로 미소를 머금게 하거나 머리가 맑아지는 경우는 있겠으나 눈물을 나게하는 시는 참 드물다. 원무현의 시 '홍어'와 '해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