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따뜻한 소음 / 전향

모든 2 2018. 5. 19. 14:24

 

따뜻한 소음 / 전향

잘 나가는 대기업에 근무하다
40대 초반에 명퇴하고는
고향에 내려와 살고 있는 그,
처자식 모두 서울에 두고
홀로 쇠약한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의 집을 찾아가 문을 여는데

삐거덕거리는 요란한 소리에
'문에 기름 좀 쳐야겠어요' 하니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은 아들 기다리다
그 소리에 들어왔구나 하고 마음 놓으실 텐데
그러면 되겠느냐'고 한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따뜻하게 이어주는 문소리가
넓고 깊은 강물로 흐르는 그 집에서
기름 쳐야겠다는 내 말이
차가운 소음이 되어 되돌아왔다

 

 

 소음은 소리를 말하되 시끄럽고 불쾌한 부정의 소리를 일컫는 낱말이다. 이것 때문에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이웃간에 소송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소리가 소음이고, 같은 종류의 소리라 해도 음의 양과 높이에서 어느 정도를 벗어나야 객관적으로 소음이라 규정지을 수 있는지는 참으로 난해하고 미묘하다.

 

 일반적으로 항공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리는 소음으로 간주한다. 두차례 전쟁을 겪고 원폭투하까지 당한 일본인은 특히 항공기 소음에 질색이다. 일본은 자국 영토로 들어오는 모든 항공기에 대하여 소음 정도에 따라 거액의 특별착륙료를 물리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 항공기에 대한 소음부과금은 세계적 추세가 되어버렸다.

 

 프랑스가 자랑했던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가 퇴출된 것도 바로 이 소음이 주원인이었다. 그런데 가령 콩코드 엔진의 설계자 입장에서는 그 굉음이 대단한 자부심일 수 있겠고, 멀리 갈 것 없이 오토바이 폭주족들에겐 시동 걸 때와 발차시의 부릉 소리가 쾌감일 수 있으리라. 또한 자동차의 경적 소리는 소음이 분명하여 유럽에서는 하루 세 번 이상 클락숀을 누르는 운전자는 정신감정을 받아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때로는 축하의 메시지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소연씨가 우주에서의 가장 큰 애로를 소음이라고 할 만큼 소음은 우리 생활과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하겠으나 민감성 귀를 가진 우리는 너무 쉽게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음으로 규정짓고서 그 소음의  울타리에 스스로 갇혀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피아노 소리, 강아지 소리, 교회 종소리, 엿장수 가위소리, 아기 울음, 엄마의 훈계, 반복되는 꽃노래 까지 소음이 된지 이미 오래다.

 

 이러다가 개구리 개골대는 소리, 귀뚜라미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 봄비 소리, 파도치는 소리도 소음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어디 냄새 안나는 방귀 한 방 마음놓고 뀔수나 있을지 솔직히 염려된다. 저 세상 아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건 어쩌면 수많은 생명의 소리들과의 동거를 말함인데 그런 소리의 각들과 시시때때로 각을 세우며 살아가는 게 과연 온당한 것인지, 그 자체로 피곤은 아니겠는지 생각해 볼일이다. 

 

 전향 시인은 잠시 민감한 귀를 열었으나, 시인의 평소 품성이 그렇듯이 얼른 규정된 소음 하나를 귓바뀌에서 지운다. 그리고 문고리에 기름을 치는 대신 달팽이관에 기름칠을 하고서 따뜻이 이를 받아들인다. 마침내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품질 좋은 문소리 하나가  삐걱인다. 온기 가득한 시인이 건져낸 소리가 참 그윽하다.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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