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모든 2 2018. 5. 19. 14:35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 시집『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중에서 -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를 나도 보았습니다. 민들레와 괭이밥도 보았습니다. 어쩌다 대구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 쯤 나도 보았던 기억을 갖고 있고요.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 또한 내가 늘 보는 풍경 목록 가운데 하나입니다. 약간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 역시 내 일상의 단란한 배경이지요.  

 

 그리고 더 있습니다. 걸음이 힘겨운 할머니가 끄는 마분지 박스 서너 장 실린 유모차가 나를 멈추게 합니다. 푸대자루와 집게를 들고 모자를 눌러쓴, 간혹 마스크를 쓰기도한 일행들의 강둑길 따라 느리게 행진하는 모습이 나를 멈추게 합니다. “아저씨, 신한카드 없으시면 하나 하세요!” 아줌마의 판매 촉진 활동이 길 가던 나를 불쑥 멈추게 하고요. 시립도서관 벤치에 앉아 생활정보지의 구직란을 볼펜으로 줄쳐가며 샅샅이 뒤지고 있는 여대생(혹은 졸업을 했거나 아닐지도 모름)의 긴 생머리 치켜 올리는 모습이 나를 멈추게 합니다.      

 

 그런데 나는 이 대수로울 것 없고 무덤덤한 풍경의 조합을 반칠환 시인과 공유하면서도 시 한 편 건지기는커녕 시심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풍경 앞에 멈칫하긴 하였으되, 그 힘으로 다시 걷는다 하기엔 왠지 거짓 같았습니다. 여전히 삶을 지탱하는 힘이 그런 것에 있다고 믿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내가 본 더 많은 쓸쓸한 것들은 어쩌면 이 땅의 사소한 단면이고 과장된 풍경일 수도 있지만 근로가 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근육을 가진 우리네 아이들을 위한 일자리는 정말 그렇게 없는 걸까요? 폼 나는 일자리가 쉽지 않아 그렇지 찾아보면 없기야하려고요. 물론 가진 자의 아량과 호의도, 봉급을 깎아 얻는 일자리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그 멈춤의 힘으로 다시 걸어야 할 수많은 젊은이들 가운데 내 아이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먹고사는 일을 이어갈 수 있는 처지인데도 그 녀석도 멀었고 나도 아직 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