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 김기택
날개 없이도 그는 항상 하늘에 떠 있고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를 나설 때
잠시 땅을 밟을 기회가 있었으나
서너 걸음 밟기도 전에 자가용 문이 열리자
그는 고층에서 떨어진 공처럼 튀어 들어간다.
휠체어에 탄 사람처럼 그는 다리 대신 엉덩이로 다닌다.
발 대신 바퀴가 땅을 밟는다.
그의 몸무게는 고무타이어를 통해 땅으로 전달된다.
몸무게는 빠르게 구르다 먼지처럼 흩어진다.
차에서 내려 사무실로 가기 전에
잠시 땅을 밟을 시간이 있었으나
서너 걸음 떼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는 새처럼 날아들어 공중으로 솟구친다.
그는 온종일 현기증도 없이 20층의 하늘에 떠 있다.
전화와 이메일로 쉴 새 없이 지저귀느라
한 순간도 땅에 내려앉을 틈이 없다.
- 시집 <사무원/1999,창작과비평> 중에서 -
반칠환 시인의 <속도에 관한 명상> 연작시 중에 ‘우리는 너 나 없이 세상을 굴러먹고 다닌다/ 아버님, 오늘은 어디서 굴러먹다 오셨나요/ 아들아, 너는 어디서 굴러먹다 이리 늦었느냐/ 여보, 요즘은 굴러먹기도 예전 같지 않아요/ 이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야......바퀴를 타자 우리 모두 후레자식이 되어 버렸다’란 시가 있다.
새 보다도 더 적게 땅을 밟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진 나도 영락없이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다. 지옥 앞마당에서 염라대왕이 하문할 때도 그리 말씀하실 것 같다.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다음 생은 지렁이로 환생토록 예약 조치 해둘 것 같다.
다리 대신 엉덩이로 다니고, 발 대신 바퀴가 땅을 밟아주는 것도 모자라 아예 공중부양하여 거처를 어정쩡한 하늘 높이에 두고도 현기증을 못 느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강하여, 지상 층에서 딩동 하고 문이 열릴 때 마다 보이지 않는 식인종 도깨비가 앞에서 '어이쿠 자판기에서 토실한 놈이 하나 나왔네, 그런데 맛은 별로 없어 보여' 할 것 같다. 살점이 오그라들어야 했으나 개의치 않고 바퀴를 움직일 열쇠를 주머니에서 빼든다.
부릉 시동이 걸리면 만사가 형통인양 담대해진다. 새보다 적게 땅을 밟든 말든, 어디서 굴러온 뼈다귀가 되건 말건 조동아리는 룰루랄라다. 날아가는 새가 씩 웃으면서 앞 유리에 똥을 찔끔 싸놓고 도망간다. 직립보행의 인간이 새만큼도 흙냄새를 맡지 못한대서야 체면이 설 일인가. 그래 오늘은 속도와 방향을 잃어버린 채 그냥 발길 닿는 대로 좀 걸어야겠다. 기왕이면 바퀴가 범접하지 못할 곳으로 가서 땅을 좀 밟자. 그래 걷자.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골프군 러브호텔면 가든리의 화훼농 김씨의 꿈/ 고재종 (0) | 2018.05.12 |
---|---|
결혼에 대하여 / 칼릴 지브란 (0) | 2018.05.12 |
목련/ 류시화 (0) | 2018.05.12 |
큰 그릇 - 바다 11 / 최동룡 (0) | 2018.05.12 |
솔직히 말해서 나는/ 김남주 (0) | 2018.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