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류시화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목련이 필 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예쁘게만 살려고 하는 여자들에게서 우린 흔히 "나는 60까지만 살래. 더 늙어지면 추할 거 같아..."란 소리를 듣는다. 아름다운 꽃의 생명주기를 닮고 싶은 열망이고, 귀엽기 짝이 없는 언사이긴 하지만 대체로 그 바람과는 무관하게 그들은 늙어갈 것이다.
다른 꽃에서도 그런 감상이 비롯되기는 하는데 특히 목련의 지는 모습에서 그 멜랑꼴리는 구체화되고 심화 학습된다. 봄의 첫 빛을 반사하여 흰빛이 더욱 눈부신 꽃잎. 그러다 다른 유색의 꽃들이 퐁퐁 터질 때면 이미 목련은 누런 수의로 갈아입는다. 그리고는 맥없이 땅으로 낙하하는데 이 무렵의 꽃잎은 피돌기라도 하는 양 다른 꽃잎에서 느끼지 못하는 맥박과 호흡이 느껴진다. 유난히 도톰하여 살점을 만지는 것 같은 질감이 있고, 한 잎 한 잎 개체로서의 꽃인 양 생각도 든다.
시인은 '잎을 피우기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의 생태적 특성에 비유하여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고 대뜸 진술하고 있으나 사실은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 알았지만'에서 넌지시 암시하듯 '허무'는 잎과 꽃의 관계 이전에 존재했으며 그것을 이미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서럽기는 마찬가지고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는 누구나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을 일만 남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하늘을 가는 눈으로 올려다보며, 조금 뜸을 들이다 더듬더듬 이렇게 말하리라. 꽃을 피우는 것 못지않게 꽃 지는 것 또한 아름다움이 아니라면 꽃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으리라. 그늘과 노을, 주름과 일몰이 아름답지 않고서는 어디 이 세상이 살아갈만한 곳이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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