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와 싸우다/ 정일근
내 시작의 버릇 하나를 말하자면
시를 퇴고할 때 조사는 추려내는 것
예를 들자면 이렇다, 이 시의 첫 문장
<내 시작의 버릇 하나를 말하자면>를 두고도
나는 오랫동안 고민할 것이다
<의>라는 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시작 버릇 하나를 말하자면>로 고치거나
<를>이란 조사가 불편하면
<내 시작의 버릇 하나 말하자면>으로
고칠 것이다, 그 두 문장을 두고
밀고 당기고 여러 날을 끙끙거릴 것이다
이 버릇은 사실 조사와 싸우는 일
지난 여름에는 시집 한 권을 묶으며
시 속에 별처럼 뿌려진 조사와 싸웠다
<은> <는> <이> <가> <을> <를> 을
죽였다 살렸다, 살렸다 죽였다
만나는 조사마다 시비를 걸며 싸웠다
시를 노래하는 것은 하늘의 일이고
시를 다듬는 것은 사람의 일인지라
반복되는 노역에 몸져눕기도 했는데
가까이 지켜보던 아내가 웃는다
당신이 무슨 부처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냐, 며 웃는다
어이쿠! 답은 그 속에 있었구나
나는 전생에 부처 공부하다 만 땡초였는지
그놈 조사와 이렇게 싸우는구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도 베라고 했으니
나를 죽이는 일은 나를 살리는 일이다
조사를 죽여 시를 살리지도 못하면서
나는 죄 없는 조사와 싸우고만 있다
어디 보자, 이 시 속에도
시비 거는 조사 몇 놈 있을 것이니
나는 또 죽였다 살렸다 할 것이다
<실천문학 2003년 겨울호>
김현은 그의 예술기행에서 ‘책이 좋은 건 언제든지 그걸 덮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그가 읽은 책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책이 갖고 있는 최대의 이점이다’라 하였다. 책은 상대와 은밀한 교호작용을 하지만 아니다 싶을 땐 그 책을 단박에 내팽개칠 자유 또한 독자에게 주어져 있다. 보다가 눈이 침침하다거나 다른 볼일이 생겼을 땐 특별히 양해를 구하지 않고 책을 덮어도 무방하다.
일반 독자의 경우도 그렇지만 글을 가끔 혹은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의 책읽기는 참으로 부담 없어 오히려 일종의 해방감마저 느낀다. 하지만 남의 글을 편하게 읽을 때와 자기가 직접 글을 쓸 때의 태도나 기분은 하늘과 땅 차이다. 간단한 잡문에서 문학 작품에 이르기 까지 글쓰기의 부담을 느끼지 않는 문학인은 없다. 특히 시 창작은 더욱 그렇다. 시인은 자연이 일러주고 생활에서 보여주는 것들을 그냥 받아쓰기 했을 뿐이라고 천연덕스레 얘기하지만 실상은 말처럼 수월치 않다.
시인은 시에서 토씨와 싸우는 과정을 소상하고 재미나게 설명했다. 이는 시작 공정 가운데 바둑으로 말하면 끝내기 수순이고 이발로 치면 '시야게'에 해당한다. 그 토씨와의 싸움 전에 이미 고독과 고뇌와 고통을 충분히 겪으면서 한 단어씩 밀고나갔을 터. 머리가 먹통이 되는 경우도 허다했을 것이다. 하여 소비자 편에서 글을 읽는 게 살생 없이 평화로운 건 말을 하나마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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