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 강은교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나부끼는 바람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 위의 아침 햇빛이 꿈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 위의 반짝이는 소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
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햇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만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 시집《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1999, 문학동네)
사랑은 호르몬에 의한 일시적 정신이상 상태이다. -쇼팬하우어-
그렇다면 첫 사랑은 정신 질환의 첫 증세다. 일시적으로 헷가닥한 것을 두고 사랑이라니, 그 우연과 헛디딤이 평생을 질질 이끌고 가다니, 추억하고 기억하며, 그리워하거나 한숨짓거나, 어느 봄날 아롱대다가 꿈결에 빨려들기도 한다니.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이 오랫동안 기억되는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한다. 러시아의 심리학자인 자이가르닉이 1927년에 발표한 이론으로 사실 별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어떤 일을 할때 사람들은 그 일을 중간에 그만두게 될 경우 계속해서 머릿속에선 남아 있는 일을 하려고 하는 동기가 작용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기억을 잘하게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일단 일을 마치게 되면 그 일과 관련된 기억들이 쉽게 사라지는데, 그런 현상을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일컫는다.
어떤 일에 접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에 적응하기 전에는 인지적으로 불균형 상태가 된다고 한다. 말하자면 바짝 긴장을 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런 긴장 상태는 그 일을 해결될 때까지 계속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러한 긴장 상태가 지속되므로 그것과 관련된 기억이 유독 생생히 남는 것이다.
그렇듯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의 경우에도 그것을 접했을 때 엄청난 설렘과 긴장이 생겨남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당연히 오래오래 기억 속에서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심리학의 한 이론에 기대어 그것만으로 첫사랑의 추억을 설명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찬바람 물러가고 아지랑이와 함께 봄기운이 올라 목련 활짝 필 이 맘 때가 되면, 그의 눈동자와 맨발과 그의 맨발이 밟은 풀잎과 풀잎의 바람과 풀잎의 바람 위의 아침 햇빛이 꿈꾼 바로 그 자리에서 바람처럼 그 첫사랑이 다시 눕는걸 어쩌랴. 몽환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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