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겨울사랑 / 고정희

모든 2 2018. 5. 12. 12:42



겨울사랑 / 고정희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번의 이슥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중에서 -




  옛날엔 어떤 계절을 좋아하냐는 통속한 질문도 더러 주고받았다. 눈이란 순백의 강하물 때문에, 혹은 방학이 있어서, 그리고 겨울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겨울이 좋다고들 답하지만, 무엇보다 겨울의 가장 깊은 매력은 그 차가움으로 뜨겁게 사랑을 촉진시킨다는 데 있지 않을까.

 문정희 시인도 '겨울사랑'에서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고 했다. 고양된 격정은 고정희 시인의 ‘겨울사랑’과 다를 바 없다.

 

 역사는 여자와 더불어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듯이 겨울밤은 사랑의 역사가 무르익기 딱 좋은 계절이 맞나보다. 고슴도치의 겨울나기 방식으로 연인은 가급적 밀착, 밀착 또 밀착이다. 가시 돋지 않은 이 겨울은 연인 사이의 거리를 물리적으로 좁혀준다.

 

 이십대를 고스란히 통금에 묶여 보내야 했던 겨울 밤. 유일하게 성탄전야와 한 해가 바뀌는 날만 사슬이 풀렸다. 넘쳐나는 명동의 인파 그리고 동성로는 젊은이와 나이든 이가 함께 점령한 거대한 주둔지였다. 고성과 교성 뜨거운 홍소 그럴 때 눈이라도 내리면 혼자라는 것은 죄악이고 수치였다.

 

 하지만 사랑이 뜨거워지면 이별의 미학이 완성되는 계절 또한 겨울이다. 누구에겐들 이 겨울 그런 사랑과 아린 추억의 필름 한 컷 없겠는가. 고정희 시인도 못 잊을 사랑 하나 품고서 몇 번의 겨울을 버티며 온 생을 떠받들었다고 하는 걸 보면 '이슥한 진실‘의 더운 사랑 하나는 가졌나 보다. 지상에 없는 그녀는 지금 ’치자꽃 향기 푸르게 범람하는‘ 어느 별에서 이 겨울과 입맞춤할 런지.

 

 

<사족>

고정희는 역사와의 대결에서 실족한 비극의 시인이다. 지리산 등반도중 실족사한 고정희는 "환절기의 옷장을 절리하듯/애증의 물꼬를 하나 둘 방류하는 밤이면/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내가 가야 할 저만치 길에/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크고 넓은 세상에/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면서 "오 하느님/죽음은 단숨에 맞이해야 하는데/이슬처럼 단숨에 사라져/푸른 강물에 섞였으면 하는데요"라며 <독신자>란 시에 서술하고선 지리산 뱀사골의 계곡물에 휩쓸려 세상을 떠나야 했다. 이 시에서 자신의 죽음을 무서울 만큼 정확하게 예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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